시작은 목소리였다. 수많은 흥행작을 연출한 감독 앞에 선 신인 배우는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차분히 대본을 읊었다. ‘이 목소리면 되겠다’는 감독의 호평에 그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후로는 노력의 시간이었다. 머리를 기르고 승마부터 액션까지 많은 걸 익혔다. 고지식한 일등 신랑감인 종사관 수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MBC ‘밤에 피는 꽃’에서 수호를 연기한 배우 이종원의 이야기다.
지난 15일 서울 논현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종원은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1회 7.9%(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한 ‘밤에 피는 꽃’은 마지막 회에서 18.4%까지 오르며 MBC 역대 금토드라마 1위에 이름 올렸다. 이전 흥행작이던 ‘옷소매 붉은 끝동’(17.4%)까지 뛰어넘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감사한 시청률이 나와 지금도 실감 안 난다”고 운을 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지금도 많이 떨리지만 많은 사랑에 감사하다”고 했다.
이종원은 수호를 연기하기 위해 손부터 바꿨다. 왼손잡이지만 오른손잡이인 수호를 떠올리며 서예·검술·양궁 모두 오른손으로 익혔다. 이와 함께 공들인 건 역시나 목소리다. “수호의 단단함은 눈빛과 목소리에서 나온다”는 확신이 있었다. “목소리만 좋다고 끝이 아니라 목소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가 중요했다”고 말을 잇던 이종원은 “낮지만 멀리 뻗어가는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종사관처럼 보이기 위해 촬영 때마다 대님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곤 했다. “한 치 흐트러짐 없어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물러지는 게 더욱 재밌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첫 주연작인 만큼 부담이 컸다. 가장 의지한 건 이하늬다. “사람으로서도 연기자로서도 기댈 수 있던” 듬직한 선배 덕에 용기를 얻었다. 현장에서 100명 넘는 스태프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을 때면 주연 배우로서 무게감과 책임감을 재차 느꼈단다. 할 수 있는 건 수호를 잘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남 말 안 듣고 뾰족하던 수호의 눈이 여화를 만나며 둥글어지길 바랐어요. 좋아하지만 대놓고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간질간질함을 표현하려 했죠.” 사랑으로 인해 변해가는 수호의 모습은 인기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여화(이하늬)와 수호의 로맨스가 무르익을수록 높아진 시청률이 이를 방증한다. 이종원은 “우리 드라마의 사랑은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아련함과 간절함·애절함이 컸다”면서 “이하늬 선배님과 연상연하로 호흡한 덕에 수호와 여화의 매력이 더 살아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어느새 7년 차에 접어든 이종원은 지금도 연기가 무척이나 재밌다. 우연히 시작한 모델 일을 기점으로 가수 이승환의 ‘너만 들음 돼’ 뮤직비디오에 캐스팅되며 연기에 발 들였다. 이를 시작으로 성소수자(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인턴의사(tvN ‘슬기로운 의사생활2’), 스파이(MBC ‘나를 사랑한 스파이’), 운명을 빼앗긴 소년(MBC ‘금수저’)까지 많은 역할을 오갔다. 이종원은 “모든 캐릭터는 내 안에 있다”면서 “새 인물을 만날 때마다 마음속에서 이를 끄집어내 키워가는 행복이 있다”며 미소 지었다. 이렇듯 즐거운 배우 생활에 변곡점으로 남을 작품이 ‘밤에 피는 꽃’이다. 이종원은 “주연을 맡으며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키웠다”면서 “열정과 욕심이 생긴 만큼 인간 이종원을 제쳐두고 배우 이종원으로 더 많은 걸 해내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밤에 피는 꽃’은 제게 특별할 수밖에 없어요. 첫 사극, 첫 주연에 액션, 로맨틱, 코미디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까요. 이런 높은 시청률도 처음이고요. 평생 기억에 남을 거예요. 사극을 잘 마쳤으니 다음엔 등골이 서늘해지는 스릴러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연기를 더 사랑하게 되니 무엇이든 해내고 싶은 마음도 함께 커졌거든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