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 막내 멤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200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빌보드 차트에 입성한 가수가 있다. ‘얼굴 없는 가수’로도 유명했던 그의 이름은 김범수. 정규 2집 타이틀곡 ‘하루’의 영어버전이 빌보드 세부 차트 중 하나인 핫 세일즈에서 51위를 차지했다. 2년 후 내놓은 ‘보고 싶다’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발라드를 대표하는 노래로 꼽힌다. 그런데 이 가수 “흑역사가 많았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지난 16일 서울 방배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범수는 말했다. “실수투성이였거든요. 매번 자빠지고 넘어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고…. 후회되는 일이 많아요.” 그는 한때 감사함을 잊었다고 한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치열함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음원 순위가 저를 판단하고, 같이 활동하는 동료들이 경쟁자로 느껴졌어요. ‘보고 싶다’를 뛰어넘는 히트곡을 빨리 내고 싶기도 했고요. 성공, 인기, 돈 같은 것들이 제 목표 안에 들어와 있던 거죠.”
1999년 데뷔해 25주년을 맞은 가수는 흑역사를 털고 초심을 찾았다. 22일 발매하는 정규 9집이 이를 보여준다. 김범수는 음반을 ‘여행’이라 이름 지었다. 동명 타이틀곡을 쓴 싱어송라이터 최유리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김범수는 자신이 데뷔하기 1년 전 태어난 이 젊은 가수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담되 나에 대한 생각을 투영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는 “노래가 그리는 여행엔 난관과 실패, 극복이 담겼다”며 “내 25년 가수 인생과 비슷한 가사라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김범수의 흔적을 고민해 만든 수제화 같은 음반”이란 소개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삶을 담은 음반이라서일까. 김범수는 날카로운 고음이나 화려한 애드리브 대신 감성에 집중했다. 그는 “진심으로 노래를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일 때만 녹음했다. 수록곡 ‘머그잔’은 감정이 잡히지 않아 녹음에만 두 달여가 걸렸다”고 귀띔했다. 작곡가들은 면면이 화려하다. ‘가수들의 가수’로 불리는 선우정아를 비롯해 이상순, 임헌일 등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김범수는 “시집 같은 음반을 만들고 싶어 가사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는 분들을 섭외했다”고 했다. 음반엔 ‘찐’ 서정시도 담겼다. 1번곡 ‘너를 두고’다. 나태주 시인이 쓴 동명 시에 멜로디를 붙였다.
김범수는 ‘여행’을 만들며 자신도 위로받았다고 했다. “5년 전 급성후두염 때문에 공연을 당일에 취소한 적 있어요. 코로나19로 무대에 오를 기회가 없어 그때의 트라우마가 계속 남아있었죠. 그걸 ‘여행’ 덕분에 치유했어요. 내가 잃은 걸 아쉬워하기보단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범수는 오는 4월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연다. 웃음기를 빼고 음악에 집중하는 자리다. 그는 “데뷔곡 ‘약속’ 등 옛 노래를 오리지널 버전으로 부를 계획”이라고 예고했다.
“50년 동안 무대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자주 말했어요. 달리기로 치면 이제 반환점에 도착한 거죠. 돌아가는 길은 이전보다 여유로웠으면 좋겠어요. 돌아보면 데뷔 전엔 성공이나 인기를 바라지 않았거든요. 노래로 사람을 위로하고 그걸 통해 저도 즐겁길 바랐을 뿐이죠. 지금 제 목표도 그래요. 초심을 되찾은 셈이에요. ‘이 노래는 왜 안 떴을까’ ‘이거보다 더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해’ 하는 생각은 내려놨어요. 제가 부른 노래를 있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