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쿠키뉴스가 만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원인을 밝힐 방법도, 책임을 질 이들도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급발진 피해자들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와 가능한 해결 방안을 담아봤습니다. |
이러한 이유로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들은 대부분 ‘가속 페달 오조작의 가능성’을 의심받는다. 이 가능성은 운전자가 주행 중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운전자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라고 단정 짓는 것과 같다. 제조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이 가능성을 차량 내 ‘사고기록장치(EDR)’에 기록된 사고 직전 5초에서 도출한다. 문제는 EDR의 기록과 피해자들이 말하는 사고 정황이 대치된다는 것이다.
EDR 데이터는 이벤트 시점(충돌, 사고기록장치의 기록 요건에 부합하는 물리적인 충격)을 기준으로 사고 직전 5초의 주행 데이터가 0.5초 단위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엔진 회전수, 가속 페달 변위량, 제동 페달 작동 여부의 데이터가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EDR 기록의 신뢰도는 얼마나 높을까.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 이상훈씨가 국과수로부터 받은 EDR 분석 결과지를 보면 사고 직전 5초 동안 가속 페달을 풀로 밟았을 때 110km/h에서 116km/h까지 증가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씨는 이 부분이 현실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상의 기록이 나와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지난달 19일 사고 상황을 재연한 결과 속도는 130km/h를 웃돌았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이 같은 결과를 두고 “110km/h에서 5초 동안 풀 액셀을 밟았을 때의 속도 변화를 관찰했는데 135~140km/h가 나왔다”며 “법원에서 선정한 전문 감정인의 분석치(136.5km/h)와 유사했다”고 설명했다.
BMW 523d 차주 송선원씨 역시 EDR 감정을 의뢰한 뒤 비슷한 답변을 받았다. BMW 공식 딜러인 한독 모터스 방배지점 기술진과 BMW 코리아 기술진이 합동으로 사고 차량 조사를 진행한 결과지를 보면, 사고 전 마지막 5초 동안 풀 액셀을 밟아 5초 동안 22km/h에서 24km/h까지만 증가했다.
송씨는 “EDR 기록대로 풀 액셀을 밟았다면 속도가 더 올랐어야 한다. 2km/h만 증가한 건 말이 안 된다. 제조사 측에서는 제가 사고 당시 기어를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며 “또 블랙박스에 제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선명하게 녹음됐다. 마치 각목을 밟는 것처럼 딱딱딱 소리가 들리는데, EDR 기록만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추론하는 건 납득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러한 분석 결과에 대해 “위급한 상황에서 인지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며 “국과수에 분석 의뢰가 들어온 교통사고 피해자의 신발 뒷면을 보면 가속 페달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은 줄 알았지만, 가속 페달을 계속 밟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과수는 2년에 걸쳐 EDR 데이터에 대한 신뢰성 검증 연구를 수행했다. EDR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제 충돌 재현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그대로 재현된다”며 “EDR 데이터가 잘못 기록됐다면 똑같이 재현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들이 공통적으로 의심받는 또 다른 점은 ‘사고 당시 변속 기어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사고가 발생한 긴박한 상황에서 변속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EDR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또 다른 대목이다.
송씨는 EDR 검증 의뢰 후 ‘엔진 무부하(기어 중립 상태)에서 가속 페달이 지속해서 조작되어 차량을 멈출 수 없어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의 결과지를 받았다. 국과수의 강릉 급발진 사고분석 보고서에도 ‘운전자가 변속레버를 굉음 발생 직전 주행(D)에서 중립(N)으로 바꿔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고, 추돌 직전 N→D로 조작했다’고 작성돼 있다.
운전자가 사고 당시 기어를 조작했다는 추론은 사고 직전 작동하지 않은 ‘자동 긴급 제동장치(AEB) 미작동’ 문제도 자연스럽게 피해자 탓이 된다. 제조사가 기어 변속에 따라 AEB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어 면죄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과수는 변속 기어 조작 가능성에 대해 운전 중 무의식 중에 내재된 습관이 있을 수 있다고 반론했다.
국과수 관계자는 “운전자는 사고 당시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신호 대기 중 혹은 주행 중 D에서 N으로 바꾸는 습관이 있을 수 있다”며 “블랙박스에 기어를 조작하는 소리가 녹음이 안 됐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어 변속 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나는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또한 “긴급제동장치가 해제되는 4가지 조건들이 있다”며 “주행 핸들이 급격히 작동하는 등 각 상황마다 해제되는 경우에 해당하면 미작동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고 있는 하종선 변호사는 국과수의 설명에 대해 “우리나라는 국과수가 EDR 기록을 내세워 거의 100% 운전자 과실로 감정서를 낸다”며 “과학 수사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 나서서 차량 결함이 없다 운전자의 과실이라 주장하면 재판부로서도 어려움이 있다. 피해자들이 기술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감정을 하기도 어려워 패소하게 된다. 제조사가 소송을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유”라고 말했다.
자동차 급발진 연구회 회장도 EDR이 급발진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EDR은 이벤트 데이터 레코더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사고 기록 장치라는 의미다. EDR의 본래 목적은 자동차 제조사가 자사 차량의 에어백이 터질 때 터지는 전개 과정을 보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에어백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어느 순간부터 사고 기록 장치로 둔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고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로 활용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제조사에서 에어백이 전개되는 조건을 필요로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내 급발진 의심사고율 1위 현대자동차는 “답변이 어렵다”는 입장만을 내놓았다. 그 외 제조사들은 EDR에 대한 높은 신뢰도를 보였다.
KG모빌리티 관계자는 “에어백 배치 시점과 같은 필수 정보를 포함해 사고 발생 시점의 차량 속도, 브레이크의 작동 여부도 기록한다”며 “차량 내부의 다양한 센서와 연결되어 데이터를 수집하는 EDR이 핵심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BMW 측 관계자는 “꼭 급발진을 위해서 만든 장치는 아니다.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차량의 신호 값을 저장하기 위해 추가로 달아놓은 장치”라면서도 “회사 입장에서는 EDR의 기록을 신뢰한다”라고 답했다.
한편 지난 2007년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일어난 캠리 승용차의 급발진 사건 소송(북아웃 소송)에서 소프트웨어 컨설팅업체 바그룹(Barr Group)은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아도 시스템은 가속페달을 밟는 것으로 오해해 급발진이 지속된다”는 취지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조은비 기자 silver_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