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 ‘소멸론’까지 불러온 저출생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가계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위기 극복에 선발주자로 나선 정부의 노력이 한계를 보이면서 이제는 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업이 나서야 하는 이유와 역할을 중심으로 저출생 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에 대해 들어봤다. |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본능적으로 결혼하고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개입하면서 지금은 결혼도 부담스러워하고 자식을 낳기 꺼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저출산 현상이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한다면, 정부 정책이 단박에 저출산 현상을 역전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출산 문제가 향후 국가 성장 동력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장은 19일 진행한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저출산 문제는 정부 정책만으로는 완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책무성 발휘와 의식 전환이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마중물이라고 주장했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장은 서울대학교 무역학과와 동 대학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난 1995년 10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근무했고, 2023년 2월 원장에 선임됐다. 현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사회보장위원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고용정책심의회, 국가교육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부의 경제사회정책 분야에 자문하고 있다.
기업의 저출산 해결 역할…“생산성 손상 없는 돌봄친화적 문화 조성이 관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 역할의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는 상황이다. 일과 가정이 양립돼야 출산·육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다. 이는 기업의 인사관리 및 직장 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 중에서는 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수 없는 사안도 많다.
허 원장은 “육아기에 예측할 수 없이 아이 곁으로 달려가야 할 때에 그럴 수 없다면, 혹은 그 부담이 모두 엄마에게 주어진다면 아이를 낳고자 했더라도 고민하고 결국 포기하는 사람이 늘 것이다”라며 “육아기에 유연하게 출근하고 퇴근할 수 있는 근무방식이 출산과 육아부담을 얼마나 덜어줄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아울러 “기업이 사회변화에 대해 책무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유연한 근무방식이 기업의 생산성 제고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보고도 많다”며 “관행적으로 지속해 오던 근무방식을 새로 바꾸고자 할 때 초기 변화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정부가 컨설팅 서비스나 수범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데 지원해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다만 허 원장은 대기업 위주로 나타나는 출산 축하금이나 난임 의료비 등 지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봤다.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정부의 보조금 정책 효과가 지금보다 훨씬 크게 나타났을 것이란 평이다. 더불어 북구(북유럽)와 같은 복지정책이 높은 수준인 나라들에서의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는 현상도 이를 방증한다.
허 원장은 “일하는 방식을 돌봄친화적으로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 관건은 돌봄친화적만 있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생산활동이 본령인 기업이 생산성 손상 없이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며 정부가 할 일도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돌봄수요만 생각하고 노동비용에 관한 고려를 등한시하면 기업 활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면서 “입법으로 강제하는 것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기업에 사회적 책무성 발휘를 호소하고, 돌봄친화적으로 일하고 있는 기업의 인사관리나 기업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 비율을 꾸준히 높여야 할 필요성도 강조됐다. 그는 “남성이 가사와 육아에 할애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은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낮다. 국제 비교를 해 보면 한국 남자가 가사와 육아에 할애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다”며 “일·가정 양립에는 기업 조직문화뿐만 아니라 남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역할이 일·가정을 양립시키는 조직문화 확산에도 필수 요소다”고 언급했다.
특히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기업의 역할 확대를 독려하는 정부 지원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출산율이 낮아져 노동공급이 줄어들면 기업활동이 제약되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 도쿄의 스미다구는 후계자를 구하지 못해서, 일할 종업원을 구하지 못해서 폐쇄 결정을 하는 중소기업이 다수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후계자가 없어 매각을 결정하는 중소기업주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허 원장은 “사회 각 부문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면 과정의 비용이 막대해진다”며 “그 비용은 결국 기업이나 개인이 부담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채를 찍어내면 정부가 부담하고, 세금으로 진행하면 국민이 부담한다고 생각하는 건 짧은 생각이다. 둘 다 국민 부담으로 귀결된다”며 “오늘의 기업 역할이나 정부 지원 확대는 미래 기업과 정부의 부담을 줄이는 것과 같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어느 순간 부담 수준이 과도해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경제가 파국적 상황에 직면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출생아 수 감소 속도가 더욱 심각해…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허 원장은 현재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출산율 수준보다 출생아 수 감소 속도가 더욱 큰 문제”라며 “단순히 심각하다는 표현으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달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출생아 수는 지난 1996년 70만명을 하회한 데 이어 2022년 25만명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에 따라 지난 5년간 어린이집은 9100여 곳이 감소했다. 10년 후에는 현재 20명 수준인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수가 10명 미만으로 떨어질 전망까지 나온다.
허 원장은 “대교협 소속 총장 3분의 2 이상이 향후 10년간 ‘적어도’ 30개 이상의 일반대학들이 폐교될 것으로 본다. 국가 존망에 직접 관계되는 병력자원도 징병기간 연장이나 여성 징병제도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20년 뒤에는 20만명으로 육·해·공군을 운영해야 한다”며 “현행 방식으로는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건강보험지출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이 두 사회보험을 유지하려면 노동비용이 높아져 한국에서 사업하려는 기업가가 없어지고, 높은 물가 때문에 소비수준도 추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이해 조정을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이해조정의 경험도 일천한데 교육, 국방, 사회보장 모두 이러한 변화에 제도를 부합시켜 나갈 시간이 너무나 촉박하다”면서 “한국의 저출산 문제 심각성이 유난히 더 두드러지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관측에 대해서 허 원장은 마이클 브린, 다니엘 튜더 등 외국인이 한국을 들여다보고 집필한 저서의 요지인 “왜 한국인은 기적을 만들어 내고서도 스스로 불행해 하는가”를 인용했다. 성장과정에서 행복하게 자라지 않은 사람이 자식을 낳으려고 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허 원장은 “이런 요인들은 정부정책으로 일거에 해소하거나 완화될 수 없다. 국민 개개인과 기업의 책무성 발휘가 중요하고 의식의 전환에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예를 들자면, 한국처럼 모든 학부모가 자신에게 버거운 수준의 사교육비를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힘들어하는 나라는 없다.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학부모에 비하면 형편에 맞게 투자하는 편이다”라며 “우리는 중등학생 자녀가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이 낮은 경로를 밟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지금은 무엇을 하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진로가 열리고 경력이 개발되는 시대다”며 “자녀 양육에서 부모의 생각이 조금만 바뀌어도, 자녀들이 결혼이나 출산 결심을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덜 부담스럽게 생각하리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허 원장은 “결혼할 만한 자신의 자격이나 자녀를 교육시킬 만한 여건을 생각할 때는 스스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초조해하는 경향이 많다. 준비된 상태란 결혼하기 전이나 아이를 낳기 전 물질적으로 충분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다. 함께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갈 각오가 있을 때가 준비된 상태다”라며 “자녀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기 전에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한 자녀를 기르는 첩경이고 출산율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