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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4세 시대 도래와 함께 총수 일가 지분이 희석되는 틈을 놓치지 않는 사모펀드들은 지금 제2의 고려아연을 찾고 있다. 44조원을 굴리는 동북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의 적대적 M&A를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은 심란하다. 사모펀드가 이제는 부실기업뿐만 아니라 거대 기업도 언제든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학습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을 끌어들인 것은 영풍이지만 약탈적 경영에 국경을 두지 않는 사모펀드가 국가기간산업에 까지 손을 뻗는 장면은 다음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쓴 소설 ‘오퍼링스’에는 재벌들의 경영권 세습을 여과 없이 비판하는 장면들이 담겨있다. ‘3루에서 태어나 세대를 거치며 재능이 희석된 재벌 2·3세들은 운 좋은 정자클럽 회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3루타를 쳐 지금의 자리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내용이 그 중 하나다. 책 속에서 재벌가 세습의 모순을 꼬집고 체제 변화를 꾀하는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 김 회장 자신은 실제 현실에서도 재벌가 경영권 분쟁에 개입하며 과거 한국앤컴퍼니그룹에 이어 고려아연과 경영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
지난달 고려아연 임시주총 이후 연일 법적대응을 예고하며 공세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영풍·MBK파트너스의 대의명분은 고려아연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 주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이들의 과거 행적은 과연 주주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방점이 찍혔을까. 인수 6개월 만에 인력을 감축한 ING생명과, 인수 후 20여개 점포를 폐점한 홈플러스, 가맹사업법 위반으로 공정위 제제를 받았던 BHC, 임금협상 노사대립으로 매각에 실패했던 롯데카드까지, 실적악화를 넘어 국가기간산업의 역할 수행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물음표만을 남기는 발자취들이다.
얼마 전 쿠키뉴스가 실시했던 여론조사 결과에서 국민들의 복심을 읽을 수 있다. 리얼미터가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한 고려아연 경영권 사태 관련 국민인식 조사 결과, 재무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는 고려아연의 장기적 가치와 재무구조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는 MBK파트너스의 주장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가량인 49.6%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해, 동의한다 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모펀드 체제에선 국내 경제는 물론 경제 안보 역시 담보될 수 없다는 중론이 모아진 셈이다.
승자의 저주. 천문학적인 돈으로 끌어 올린 주가 탓에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후폭풍은 피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미래를 준비할 투자 재원 마련에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앞으로 더 큰 글로벌 사모펀드들이 기업 승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도 크다. 국가기간산업과 경제 안보가 달린 문제다. 시장경제 원리를 거스를 순 없겠지만 국가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태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