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AI 광풍’ 맞은 바둑계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 [데스크 창]

10년 전 ‘AI 광풍’ 맞은 바둑계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 [데스크 창]

기사승인 2025-07-24 15:35:43 업데이트 2025-07-24 15:36:42
이영재 문화스포츠부장
챗GPT 등장 이전 인공지능(AI) 대명사는 단연 ‘알파고’였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무너뜨리고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건 2016년 3월인데, 사실 알파고가 바둑계에 처음 등장한 시점은 2015년이었다.

딱 10년 전이었던 2015년, 알파고는 ‘유럽 바둑 챔피언’이라는 낯간지러운 타이틀을 달고 있던 중국 프로기사 판후이 2단과 먼저 대결을 펼쳤다. 바둑은 사실상 동양 삼국(한국·중국·일본)에서 주로 펼치는 두뇌 스포츠인 만큼, 알파고가 ‘변방’ 유럽을 먼저 정복한 후 메이저 무대인 아시아로 온 셈이었다.

이후 스토리는 전 세계인들이 모두 목도한 그대로다. 이세돌은 패배했고, 바둑계는 그 어떤 분야보다 더 빠르게 AI에 정복당하는 신세가 됐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기에는 사람이 만나서 펼치는 세계바둑대회가 소강 상태를 보이자 초유의 ‘인공지능 바둑대회’가 열려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페이스북(현재 메타)이 ‘다크 포레스트’라는 바둑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회에 출전하는 등 세계 유수의 테크 기업들이 참전했고, 중국 텐센트에서 만든 최강의 바둑 AI ‘절예’가 정상에 올랐다.

이제 인간의 바둑은 끝났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컴퓨터에게 정복당한 바둑은 더 이상 인류 최고의 두뇌 게임이라는 영예를 누릴 수 없고, 하락세는 가속될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프로기사들이 펼치는 공식 기전은 오히려 더 늘어났고, 지자체에서 앞다퉈 바둑 대회를 개최하면서 유명무실했던 ‘바둑진흥법’은 알파고 이후 빛을 보기 시작했다.

비밀은 AI를 경쟁 상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로 인식한 데 있었다. 알파고에게 1승을 거둔 이후 전 세계적 유명인이 된 이세돌 9단(울산과학기술원 특임교수)은 “이제 AI와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다”면서 “AI를 활용해 각자의 개성과 강점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둑계는 초기에는 우왕좌왕했지만, AI를 동반자로 인식하기 시작하자 안정을 되찾았다. AI 덕분에 바둑 입문 단계에서 ‘진입장벽’이 낮아질 수 있었고, 기력이 높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프로 최고수의 대국을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최고 인기 기전 농심배에서 진귀한 현상이 있었다. 제2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한국 대표 5명의 평균 연령이 ‘32세’로 확정된 것이다. 이는 23년 전이었던 제3회 농심배 당시 ‘32.6’세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자, 22년 전인 4회 대회 이후 처음으로 평균 연령 30세를 넘긴 기록이다.

일본이 세계 바둑계를 주름답던 시기에는 ‘40세부터 바둑이 원숙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이와 무관한 분야라는 인상을 줬지만, 영화 ‘승부’ 실제 주인공 이창호 9단이 16세의 나이로 메이저 세계대회인 동양증권배를 제패한 이후부터는 바둑 역시 여타 스포츠처럼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를 최전성기로 보게 됐다. 메이저 세계대회 17회 우승을 차지한 ‘바둑 국보’ 이창호 9단조차 만 30세 이후에는 세계대회 우승이 없을 정도이니, 바둑 역시 30대를 넘기는 시점을 현역의 마지노선으로 본다.

하지만 몇 년전부터 기류가 바뀌고 있다. 1985년생 ‘황소’ 원성진 9단(40세·한국 랭킹 8위)이 ‘랭킹 역주행’ 신화를 쓰면서 국내는 물론 각종 세계대회에서도 맹활약한 데 이어, 최근에는 1991년생 안성준 9단(34세·한국 랭킹 5위), 1992년생 이지현 9단(33세·한국 랭킹 7위) 등이 Top 10에 재진입했다. 특히 안성준·이지현 9단은 앞서 언급한 농심배에서 올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늦깎이 돌풍을 일으킨 기사들은 입을 모아 “AI와 함께 공부하면서 30대 이후에도 오히려 기량이 향상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AI 광풍’ 이후 10년이 지난 바둑계는 막연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인공지능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한 단계 도약했다. 자고 일어나면 우후죽순처럼 신종 AI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시대, 바둑계에서 ‘오래된 미래’를 본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