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나라로 한국에서 전기차 충전 사업은 오히려 버티기 힘든 산업이 되고 있다. 충전기 설치를 위한 예산은 남아 있지만, 이를 실제로 운영할 민간 사업자들은 수익성을 이유로 하나둘 현장을 떠나고 있다. 전기차 보급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충전 인프라의 ‘운영 구조’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LG전자 연구원이 하이비차저 충전기로 전기차를 충전하고 있다. LG전자 대기업도 발 뺐다... 잇단 사업 축소·철수
전기차 충전 업계에서는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사업 축소·철수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화큐셀은 지난 5월 CPO(전기차 충전소 민간 사업자) 계열사인 한화모티브가 보유한 충전기 약 1만6000기를 매각하고 전기차 충전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4월 LG전자는 전기차 충전기 제조 사업에서 진출 3년 만에 손을 뗐고, SK네트웍스도 자회사 SK일렉링크 지분 일부를 홍콩계 사모펀드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연쇄적인 대기업 이탈 배경으로 민간 충전 인프라에 대한 투자 요건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을 꼽는다. 정부가 충전 요금을 사실상 동결한 상태에서 공공 주도의 충전 인프라 확충까지 병행되면서, 민간 사업자들의 사업 여건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에 대한 요금 인상은 제한됐지만 설치 및 유지비용 부담은 커지면서 민간 사업자들이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고 말했다.
“예산 있어도 사업자들이 신청을 안 한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자체 공모 사업 현장에서도 감지된다. 한 지자체 전기차 충전 담당자는 “현재 충전기 사업자들이 시장을 다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수익이 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보니 사업자들이 신청하지 않아 예산도 남는 이러한 구조가 반복된다”고 토로했다.
한 업계 관계자 역시 “업계 전반에서도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다”며 “전기차 충전 요금이 정책적으로 관리되는 상황에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졌다”고 말했다.
전기차 충전 요금은 자율 요금제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부와 기후부가 주도하는 로밍(표준화된 요금 시스템) 체계와 평가 기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로밍 요금은 이용자 편의성을 올려주지만, CPO의 요금 설정 자율성을 제한하는 구조적 한계도 함께 안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17일 공개한 사업자 간 로밍 요금(급속, 공급용량 50kW 이상). 한국소비자원 업계 관계자는 “기후부 등에서 사업자 평가를 할 때 요금을 비싸게 올리면 평가에 불이익이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기요금과 기본요금 부담은 커졌는데 충전 요금은 사실상 묶여 있다”며 “일부 사업자들은 요금 체납이나 법정관리까지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고 전했다.
다만 충전 사업자 이탈은 단순히 전기요금 부담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국 가정용 전기요금은 OECD 37개국 가운데 2023년 기준 메가와트시(MWh)당 130.4달러로 35위권에 속해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여전히 저렴한 수준이다. 산업용 전기요금도 2022~2024년 사이 7차례 인상으로 킬로와트시(kWh)당 73원 상승하긴 했지만, 절대 가격은 여전히 중하위권이다. 낮은 전기요금에도 불구하고 충전 요금 규제와 기본요금 부담, 낮은 이용률이 맞물리며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전국 급속 충전기 비중 기준 상위 4개(왼쪽 그래프)·하위 4개 지역. 한지영 디자이너 급속 대신 완속…비용 부담이 만든 불균형
이 같은 수익 구조 속에서 충전 인프라는 급속보다는 완속 위주로 확충되고 있다. 쿠키뉴스가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전기차 충전 인프라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10월 기준 전국 전기차 충전기 47만2071기 가운데 급속 충전기는 5만2330기, 완속 충전기는 41만9741기로, 급속 비중은 약 11% 수준에 그친다. 수도권과 광역시를 포함한 대부분 지역에서 완속 충전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구조다.
지역별로 보면 이러한 불균형은 더욱 뚜렷하다. 쿠키뉴스가 기후부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전체 충전기 6만8333기 중 급속은 5867기에 불과하고, 경기 역시 13만6392기 가운데 급속 충전기는 1만2607기에 그친다. 부산·대구·인천 등 주요 광역시도 급속 비중이 10% 안팎에 머물러 있으며, 제주 역시 전체 1만1754기 중 급속은 2120기로 완속 충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급속 충전기 확충이 더딘 배경으로 높은 비용 부담을 꼽는다. 급속 충전기는 완속 충전기보다 설치비는 물론 전력 인입 비용, 유지·보수 비용까지 크게 들어간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급속 충전기는 완속 대비 설치비가 8~10배에 달해 사업성이 나오기 어렵다”며 “사업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설치할 만한 곳은 다 설치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 또한 “현재 구조에서는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급속 충전기가 많이 늘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주차장에서 전기차를 충전하고 있는 모습. 김수지 기자 급속 충전기 비중이 작을수록 이동 중 충전이나 외부 충전에 의존하는 이용자들의 불편은 커질 수밖에 없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급속 충전기가 완속보다 더 많이 보급돼야 한다”며 “다른 선진국은 급속 충전기 비중이 30~50% 수준인데, 우리는 10% 정도에 그친다. 특히 관광 명소나 이동 수요가 많은 지역일수록 급속 충전기 수요가 크다”고 말했다.
이민하 한국전기자동차협회 사무총장은 충전 사업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초전기차 충전 사업은 쓰든 안 쓰든 기본요금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라며 “가정용 전기요금과 달리 초급속 충전기는 기본요금 자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고 말했다.
이 사무총장은 “주유소처럼 차량 회전율이 높아야 수익이 나는데, 현재 전기차는 이용자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전기차 보급이 안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기본요금을 50% 감면해 준다면 충전 사업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