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이거 다 적어야 하는 기가” 50대 남성은 불평하면서도 인적사항을 쓱쓱 적어 내려갔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경북 성주군으로 시작하는 주소를 기재했다. 서명까지 마친 후 제출한 서류는 ‘새누리당 당원 탈당 신고서’였다.
평생 ‘1번’만 찍어왔다던 그는 스스로 당적을 버렸다. 서명 장소에서 1.5㎞ 남짓 떨어진 성산포대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배치한다는 발표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20일 오후 2시.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주군청 앞 ‘성주 사드 배치 저지 투쟁 위원회’(투쟁위) 천막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투쟁위 탁자 위에는 활동 경비 마련을 위한 모금함, 사드 배치 저지 서명 그리고 새누리당 탈당 신고서가 놓여 있었다.
투쟁위 천막에서 일을 돕던 이모(60·여)씨는 성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그는 “나를 포함해 성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새누리당 지지자였다”면서 “사드 배치 발표 이후 대부분 마음이 돌아섰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막을 찾은 또 다른 남성이 새누리당 탈당신고서 3부를 내밀었다. 이씨는 “이런 게 벌써 800장은 넘게 쌓여있다”고 설명했다.
투쟁위는 지난 18일부터 천막에서 새누리당 탈당계를 접수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앞서 13일 정부가 성주 사드 배치를 공식 발표하자 이에 대한 환영의 뜻을 밝혔다.
투쟁위 총무재정분과 부단장을 맡은 도희제(45)씨는 “새누리당에 꼬박꼬박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당원이었다”고 과거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도씨는 사드 배치 발표 이후 “당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탈당했다”며 “사드 배치 지역과 군의 중심인 읍내 간 거리가 1.5㎞로 너무 가깝다”고 토로했다. 이어 “정부와 국회가 ‘우리를 개돼지로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며 분노했다. 도씨의 집과 사드가 배치될 곳의 거리는 200m 안팎이다.
21일 열릴 상경시위 물품을 정리하던 김모(47)씨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에 입당, 지금껏 당적을 지켜온 열성 당원이었다. 그는 “성주군민 4만8000명 중 1만5000명 이상이 새누리당 당원”이라며 “이곳에서 여당을 지지하는 것은 ‘모태신앙’과 같은 일이었는데 오죽하면 당을 버리겠나”라고 푸념했다. 김씨는 앞서 16일 당에 직접 전화를 걸어 탈당 절차를 밟았다.
새누리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민주정의당 시절부터 30년간 당원이었다던 조모(58)씨 역시 “탈당계를 조만간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 새누리당만 찍어왔는데 배신감이 크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확한 탈당 예정일에 대해 묻자 “그래도 새누리당에서 하는 걸 하루 이틀 더 지켜본 뒤에….”라며 말을 흐렸다.
군청 앞에서 만난 군민 김충환(55)씨는 “새누리당 당원이 되지 않으면 이 지역에서 사업을 하기 힘든 분위기”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탈당했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라고 털어놨다.
성주 민심은 확고했다.
군청 앞 성주로에 위치한 상가 50여 곳 중 29곳의 입구에 ‘사드 배치 결사반대’ 스티커가 붙어있다. 한 집 건너 한 집꼴이다.
성주군 성주읍에서 광고업체를 운영하는 이모(38)씨는 “내가 직접 건 플래카드만 100개가 훨씬 넘는다”며 “선거철보다 배로 바쁘다. 광고업을 하는 사람들은 현재 잠을 못 자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지역단체, 사모임은 물론 개인도 플래카드에 대해 문의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성주군민들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에게 77%의 지지율을 보냈다. 18대 대선에서는 투표를 한 군민의 86%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소통 없이 이뤄진 사드 배치 발표 이후 상황은 변했다.
해가 떨어지자 성주군청 앞에 속속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드 배치 철회를 위한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엄마가 만들어줬다는 ‘사드 배치 반대’ 가면을 들고 온 중학생부터 “살면서 내가 ‘집회’라는 것에 참여할 줄 몰랐다”는 7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사드 반대’를 외치며 새누리당에 대한 배신감을 표현했다.
경북 성주=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