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영화지만, 사실 범인이 누군지 찾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을 본 관객들 중 시원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선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버닝’은 미스터리를 집요하게 쫓는 주인공 종수(유아인)와 그의 선택이 결말에 그려지는 선명한 영화다. 불친절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그려온 이창동 감독의 전작에 비하면 명확한 장면들이 많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나면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 범인을 찾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니. ‘버닝’은 대체 어떤 영화인 걸까.
최근 서울 팔판길 한 카페에서 만난 이창동 감독은 감독이 나서서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 감독은 “이렇게 많은 매체와 인터뷰하는 자리는 처음”이라며 “주방장이 나가서 손님들과 얘기한다고 짜장면 맛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라고 어색한 마음을 털어놨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를 전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감독은 1~2시간 내에 모두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코드를 영화에 심어 놨다. 남산타워에 비친 빛줄기가 극 중 해미(전종서)의 집안으로 들어오는 설정도 그 중 하나였다.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해미의 집으로 들어오는 설정을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설명보다는 표면적인 거예요. 제가 영화 속에 코드로 심어놨다고 하는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설명 없이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길 바랐어요.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이 들어온다는 것도 설명보다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그게 사실은 햇빛처럼 보이지만, 반사된 빛이니까 빛이 아닌 거죠.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영화 속 모든 코드는 사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조금 다른 종류의 미스터리”라고 표현했다. 여러 겹의 미스터리가 겹쳐진 형태라는 얘기였다. 다양한 맥락의 서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그런 형식은 곧 지금 세상에 대한 미스터리를 영화적으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와 그것을 마주한 관객의 막막함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느끼는 생각과 같다.
“요즘 청년들은 근원적으로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해요. 우리 때는 먹고 사는 문제든, 정치 문제든 답이 분명한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요. 지난해 일어난 촛불 혁명과 탄핵은 눈앞에 있는 문제를 직접 봤으니까 해소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청년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나아지진 않았죠. 또 긴 싸움이 필요할 텐데 누구와 어떤 싸움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저도 그렇고, 젊은 청년들에게도 세상이 미스터리처럼 보일 것 같아요. 더 막막한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창동 감독은 ‘버닝’이 칸 영화제에서 극찬 받은 것과 한국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단순한 불만은 아니었다. 이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했다. 그가 20년 넘게 영화를 만들며 느낀 감상이기도 하다.
“우디 알렌 감독이 어릴 때 디즈니랜드에서 영화를 보다가 너무 영화에 빠진 나머지, 스크린에 손을 넣어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빛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영화는 스크린에 비치는 빛이에요. 물질성을 갖고 있지 않죠. 그런데 사람들은 영화를 자기 나름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해요. 그게 과연 뭘까요. 어쩌면 버려진 비닐하우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어요. 비닐하우스는 안에서 농작물을 재배할 때만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건, 관객들은 영화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뮤지컬을 보러가도 해설 쓴 걸 보고 이해를 하려고 하고, 연극이나 미술품을 봐도 해석하려고 하죠. 소설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영화는 해석하기보다 체험하려고 해요. 자기가 느낀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의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영화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고, 역설적으로 그만큼 비어 있는 것이기도 해요. ‘버닝’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실체가 없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태워버리면 끝인 거죠.”
‘버닝’은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발표한 영화다. 대부분 영화들이 긴 시간 준비를 거쳐 탄생했지만 이번이 가장 길었다. 평론가들 사이에선 문학적이었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버닝’을 기점으로 더 영화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 감독 역시 자신은 항상 변화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 나름대로의 질문을 담는 태도다.
“제가 영화로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이라는 오해가 있어요. 하지만 전 한 번도 메시지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메시지나 답을 찾는 건 관객의 몫이지, 감독이 던져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전 지금까지 늘 질문하기 위해서 영화를 했어요. 관객들이 지금 시대에 이 서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떤 서사를 원하는지, 그리고 영화는 어떤 건지에 대해 질문해보고 싶었죠. 질문이 담긴 영화를 보고 답을 찾거나. 스스로 그 질문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메시지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가 가장 강하고 알기 쉽게 전한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버닝’은 서사나 매체에 대한 내용이 추가돼서 질문이 더 복잡해졌죠. 그래도 누군가는 바꿔야 하고, 누군가는 낯선 영화를 해야 해요. 그래야 그것이 다음에는 새로운 것으로 다가갈 수 있잖아요. 그게 한국영화 산업 전체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