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산 게임 역사상 최고의 글로벌 흥행작이 탄생했다. PC 온라인 게임 플랫폼 스팀에서 동시접속자 수 310만을 기록하고 콘솔을 포함해 3000만 이상 이용자를 모은 ‘배틀그라운드’다. 국내 PC방 사용시간 점유율에서도 28주째 1위(게임트릭스 기준)를 지키고 있다.
블루홀 자회사 펍지가 선보인 배틀그라운드는 제한된 공간에서 100명의 이용자가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배틀로얄’ 방식의 슈팅 게임이다. 각종 장비를 획득(파밍)하고 적을 피해 숨거나 전투를 치르는 긴장감이 주된 인기 요인이었으며 2인 또는 4인이 호흡을 맞춰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재미를 배가했다.
배틀그라운드의 흥행은 세계적인 ‘배틀로얄 열풍’을 일으켰고 PC, 모바일을 가리지 않고 유사한 방식의 각종 아류작을 쏟아냈다. 뿐만 아니라 기존 유명 게임들까지 이 같은 게임 방식을 차용한 모드 콘텐츠를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펍지가 지난 1월 법원에 미국 에픽게임즈 한국 지사 에픽게임즈코리아를 상대로 슈팅 게임 ‘포트나이트’에 대한 표절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법적 대응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목을 끌었다.
에픽게임즈는 최근 각종 게임 개발과 영화 CGI 등 작업에 활용되는 ‘언리얼’ 엔진을 공급하는 미국 게임 개발사로 FPS(1인칭 슈팅) 게임 ‘언리얼’ 시리즈와 ‘포트나이트’ 등이 대표작이다. 역설적으로 배틀그라운드도 ‘언리얼 엔진4’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펍지의 이번 소송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표절로 주장하는 부분과 그 논리에 대한 질문에 펍지 측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저작권 보호 차원에서의 행동”이라는 원론적인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피소 측인 에픽게임즈코리아 관계자도 함구했다.
▶ 얼마나 닮았나?
포트나이트는 배틀그라운드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슈팅 게임이다. 4인 협력으로 진행되는 본 게임 ‘세이브 더 월드’보다 배틀그라운드와 비슷한 진행 방식의 ‘배틀로얄’ 모드가 무료로 공개되면서 해당 장르 최대 경쟁작으로 떠올랐다.
포트나이트에서 배틀그라운드와 유사한 부분은 100명의 인원이 섬에 낙하해 건물에서 아이템을 구하고 점차 줄어드는 제한 구역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다는 기본 설정이다. 낙하 전 배틀그라운드는 수송기, 포트나이트는 열기구가 달린 버스에서 시작하는 점과 각각 ‘자기장’, ‘폭풍의 눈’으로 표현하는 제한 구역 경계가 존재하는 것 등은 실제로 유사성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두 게임의 게임성은 분명히 구별된다. 배틀그라운드는 그래픽 묘사부터 게임 내 자동차 등 탈것, 총기와 각종 장착 부품 아이템, 탄도 개념이 적용된 전투까지 사실성을 추구한다면 상대적으로 포트나이트는 만화적인 그래픽과 빠른 액션을 갖춘 아케이드성 게임이다.
특히 포트나이트는 고유 시스템인 ‘액션빌딩’으로 전투에 건설 개념을 접목했으며 자동차나 총기 부품 등 복잡한 요소가 없는 대신 점프대와 활강을 이용한 비현실적 아이템 활용으로 전반적인 게임 진행에 다른 양상을 띤다.
즉 배틀그라운드와 포트나이트는 배틀로얄로 불리는 같은 방식의 룰 안에서 일부 유사성을 갖지만 다른 게임성을 제공하는 두 게임이다. 한발 먼저 나온 배틀그라운드가 포트나이트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표절’과 ‘참고’의 범주에서 견해가 엇갈릴 수 있다.
▶ 배틀로얄의 아버지 ‘배틀그라운드’?
그렇다면 배틀로얄 게임의 원조는 배틀그라운드인가.
우선 슈팅 게임에서 최후의 생존자를 가리는 방식은 주로 ‘데스매치’라는 명칭으로 구분돼 왔다. 전투를 통해 상대를 모두 섬멸하는 개념이 강해 각종 아이템을 활용하면서 버텨내고 생존하는 데 무게를 두는 배틀로얄과 다소 차이가 있다.
지금의 배틀로얄 방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는 대표작으로는 ‘H1Z1’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밀리터리 FPS 게임 ‘아르마2’를 기반으로 좀비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개별 모드 ‘데이즈’가 만들어졌고 이 구성을 이어받은 H1Z1에서 배틀로얄 모드가 인기에 힘입어 본 게임 자리를 차지했다.
펍지가 H1Z1을 개발한 브랜든 그린을 영입해 배틀그라운드를 만들었으므로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브랜든 그린이 기존 게임의 모드로 구현해온 배틀로얄을 본격적인 독자 게임으로 기획, 개발했다는 점에서는 배틀그라운드가 ‘원조’를 자처하는 것도 설득력을 가진다.
다만 기존 모드로 태어난 H1Z1의 배틀로얄이 이미 독자적인 게임으로 자리 잡았으며 다른 장르에서도 모드로 출발해 독자 게임이 된 사례가 많기 때문에 배틀그라운드가 표절이라는 명목으로 후발주자를 배척하는 논리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 게임 발전 과정 속 배틀로얄
배틀로얄 외에도 모든 게임 장르에는 그 원조 격인 작품이 있었다. 이후 발전 과정에서 점차 세분화 되며 새로운 장르가 탄생해왔다. 배틀그라운드와 같이 해당 장르 대표작으로 알려진 게임이 알고 보면 다른 게임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많다.
배틀그라운드를 포함하는 TPS(3인칭 슈팅) 형태 이전에 FPS 게임은 1990년대 ‘울펜슈타인’과 ‘둠’ 이후 유행을 탔고 당시 국내에서도 ‘임꺽정’ 등 많은 아류작이 만들어졌다. 이후 둠을 만든 ID소프트가 3D 그래픽의 ‘퀘이크’를 만들고 에픽게임즈의 ‘언리얼’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모드가 탄생했다.
또 다른 FPS ‘하프라이프’는 테러범과 대테러 팀이 격돌하는 밀리터리 모드 ‘카운터스트라이크’로 인기를 모아 독자 게임 시리즈로 분리시켰고 이후 같은 방식을 도입한 국산 FPS ‘서든어택’, ‘스페셜포스’ 등까지 이어졌다.
‘오버워치’의 경우도 초반 폭발적인 인기 덕분에 팀 기반 FPS 대표작으로 인식됐으나 ‘팀포트리스’ 시리즈 등이 이미 선보인 방식을 차용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로 대표되는 MOBA(멀티플레이온라인배틀아레나) 장르도 ‘스타크래프트’의 ‘AOS’, ‘워크래프트3’의 ‘도타’ 모드에서 시작됐고 도타는 개별 게임인 ‘도타2’로 이어졌다.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의 RTS(실시간전략시뮬레이션) 역시 ‘듄’과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가 먼저 개척한 장르다.
이 같은 발전 과정을 보면 수많은 게임들이 서로의 장점을 이어받고 새로운 요소를 더해 개선하며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중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지만 독자적인 게임성을 인정받으면 시장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받아들여져 왔다.
게다가 배틀로얄 게임은 그 인기에 힘입어 지금도 장르불문, 다양한 기존 인기작에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여러 신작들의 출시와 함께 고유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배틀그라운드는 선두주자 격이 되는 셈이다.
이미 독자적 샌드박스 형태의 ‘마인크래프트’부터,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그랜드테프트오토(GTA)’ 시리즈, 팀 기반 FPS ‘팔라딘즈’까지 배틀로얄 형태의 모드가 더해졌으며 스팀에도 ‘라스트맨스탠딩’, ‘SOS’, ‘래디컬하이츠’ 등 비슷한 신작들이 올라와 있다.
두터운 팬층을 갖고 있는 밀리터리 FPS 인기 시리즈 최신작 ‘배틀필드5’와 ‘콜오브듀티 블랙옵스4’마저도 배틀로얄을 결합한 모드를 갖추고 출시될 예정이다. 중국에서는 넷이즈가 배틀그라운드와 유사한 ‘황야행동’을 선보였고 텐센트도 ‘유로파’를 준비 중이다.
▶ 블루홀-펍지는 무엇을 얻을까
이런 상황에서 펍지가 배틀그라운드와 유사한 형태의 배틀로얄 게임 모두와 표절 시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 등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이 경쟁 과정에서 시장 선택에 의해 비슷한 형태가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게임계만 봐도 다른 작품의 일러스트 배경이나 캐릭터 디자인 등을 무분별하게 베끼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업계의 건전한 생산 활동을 저해하는 표절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펍지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배틀그라운드에서 차용한 구체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표절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이 같은 대응을 통해 원조의 입지를 강조하고 특히 포트나이트와 같이 위협적인 상대를 견제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현재 포트나이트가 국내 PC방 공식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도 민감한 부분이다.
또한 모회사인 블루홀은 배틀그라운드가 흥행하자 전적으로 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자회사로 펍지를 독립시켰다. e스포츠 흥행을 위한 잰걸음도 보여왔다. 배틀그라운드가 블루홀과 펍지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펍지는 에픽게임즈코리아 외에도 미국에서 넷이즈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기준은 밝히지 않았지만 “단순히 장르가 같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과를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지식재산 보호 외에 흥행 방어와 같은 어떤 시장 효과를 기대한 행동이라면 게임계의 지지를 받긴 힘들어 보인다.
김정우 기자 taj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