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08-04 01:00:00

스트라트포드 어폰 에이븐에서는 버스가 늦게 오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리버풀로 출발했다. 리버풀 근처에 있다는 명품 아웃렛에 들르는 일정이 있었는데, 시간에 쫓긴 탓에 구경도 건성이었던 것 같다. 사실 명품도 자주 봐야 안목이 생긴다는데 평소에 관심이 별로 없다보니 명품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8시반 경 리버풀의 머지강가에 있는 숙소, 풀만 리버풀(Pullman Liverpool)호텔에 도착했다. 늦은데다가 저녁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저녁식사를 했다. 대구 튀김과 쇠고기를 잘게 찢어 양념한 메뉴가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매튜가에 있는 캐번클럽(Cavern Club)으로 향했다. 머지강은 썰물 때라서인지 수면이 저만치 내려가 있었다. 살짝 덮인 구름 사이로 서편으로 넘어가는 해가 얼굴을 내민다. 구름에 비친 노을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머지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가에 수많은 선거(船渠)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때 조선업이 흥성했던 흔적일 것이다. 리버풀 박물관을 지나면 워터프론트, 즉 해안거리가 나온다. 강을 가로지르는 퀸즈웨이 터널이 시작되는 곳으로, 여객선 터미널과 아시아 식당이 들어서 있다. 공터에 있는 놀이기구는 기다란 철제구조물 양 끝에 각각 8명을 태우고 빙글빙글 돌리는데 구경하는 것만도 아찔했다. 일행 가운데 가장 어린 중2, 2 친구 둘이 나서서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 놀이기구에 눈을 팔다보면 비틀즈 멤버들의 동상을 놓칠 수도 있다.

어두워질 때까지 강변 놀이터에서 빈둥거린 것은 매튜가의 클럽들이 후끈 달아오를 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매튜가는 강변 놀이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클럽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좁은 골목에는 클럽을 찾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캐번클럽은 비틀즈가 함부르크에서 돌아와 처음 연주를 시작한 곳이다.

우리가 들어간 클럽은 지하에 있었는데, 그 반대편에도 캐번클럽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청한 연예프로그램에서도 캐번클럽을 찾았는데, 건너편에도 캐번클럽이 있어 헷갈렸다. 다만 우리가 들어간 캐번클럽의 건물 벽에 존 레넌이 발을 꼰 건방진 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진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위키피디아 자료에 따르면, 처음 캐번클럽을 연 사람은 앨런 시트너(Alan Sytner).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 재즈(Jazz) 구역에 있는 수많은 클럽들이 지하실에 들어 있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리버풀로 돌아온 그는 같은 형태의 클럽을 운영하기 위해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 끝에 결국 워터프론트에서 가까운 매튜가에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공습대피소로 사용되던 과일창고를 발견했다. 클럽은 1957116일에 개장했다. 첫날 공연에서 머지시피 재즈밴드(Merseysippi Jazz Band)가 무대에 올랐다.

비틀즈가 캐번클럽 무대에 처음 올라선 것은 196129일로, 독일 함부르크의 인드라와 카이저켈러 등의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마치고 리버풀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의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보여주던 독일밴드풍의 연주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비틀즈는 캐번클럽의 무대에서 292회 연주했다. 비틀즈는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She Loves You)’를 녹음한 지 한 달 뒤인 196381일 캐번클럽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했고, 5개월 뒤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비틀즈가 연주하던 원래의 캐번클럽은 19733월 지하철공사 때문에 문을 닫았다. 하켄색(Hackensack)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한 밴드다. 캐번클럽은 오래지 않아 길 건너 매튜 7번지에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름을 레볼루션 클럽으로 바꿨다. 1984410일 매튜 10번지에 원래 캐번클럽에 있던 벽돌 등을 이용해 재건축한 캐번클럽이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간 캐번클럽이 비틀즈가 처음 연주한 장소가 맞다.

매튜가는 자정이 넘어야 분위기가 끓어오른다는데, 고막을 찢을 듯 요란한 연주소리에 끌려 지하클럽에 입장했다. 입장료는 없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달랑 맥주 한 잔 올려놓고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비용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충 스무 개 정도 되는 의자는 벌써 채워져 있었고, 무대 앞에 작은 공간을 남기고 들어선 사람들은 이미 연주에 빠져 몸을 흔들고 있었다.

여성 리드기타, 남성 베이스기타, 여성 드럼으로 구성된 3인조 밴드는 그룹 브론디의 지금은 파도가 높지만(The Tide is High)’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곡들을 이어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바람에 필자 역시 아내와 함께 클럽을 나서야 했다

좁은 실내를 가득 채우는 요란한 연주에 질렸던 모양이다. 맥주도 한 잔 시켜 마시면서 연주를 즐겼어야하는 데 아쉽다. 하지만 일행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캐번클럽에서 나와 매튜가를 따라가다 보니 많이 본 듯한 포즈의 여가수 동상을 앞에 세운 클럽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비틀즈를 내세우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폭발적인 록 음악에 빠지다보니 왠지 후련한 느낌이 남는다.

비어있는 선거(船渠)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나니 금세 자정이 넘어간다. 사실 이날 저녁에 매튜가를 찾는 일정은 계획에 없었다. 리버풀에 왔으면 비틀즈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현지가이드의 재량으로 진행한 일정이었다. 2km가 넘는 거리를 왕복한 탓에 이튿날 모닝콜이 울릴 때까지 골아 떨어졌다.

이번 여행길에 맞는 두 번째 아침이다. 자정에 눈을 뜬 전날과는 달리 4시 경에 눈을 떴다. 시차 적응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전날 자정 무렵 하루 일정이 끝난 점을 고려한 듯, 9시에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서기 전에 켠 텔레비전에서 윔블던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보니 윔블던 여행 중에 혹여 생길지 모르는 테러에 대비해 영국사회 전체가 아주 긴장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숙소를 나서서 어제 밤에 다녀왔던 길을 되짚어 매튜가로 갔다. 가는 길에 보니 도시 전체가 벌써 깨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가판대마저도 손님 맞을 준비를 끝냈고, 거리의 가수도 벌써 노래를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을 매튜가 역시 저녁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고 새날을 맞을 준비가 끝나가고 있다.

매튜가 근처에 있는 쇼핑센터에 들어가 보았지만, 이른 시간인지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만일 전날 밤 와보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비틀즈가 활동하던 지역이라고 해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배려에 감사한다.

언젠가 음악을 좋아하는 작은 아이에게 비틀즈의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비틀즈의 음악은 세대를 뛰어넘는 무엇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비틀즈 음악을 처음 들었던 것은 서울로 올라온 1970년대 중반이었다.

밤샘공부를 같이 한다고 친구집에 갔다가 비틀즈 앨범을 처음 봤다. 그날 저녁 비틀즈 노래를 듣느라 시험공부는 저만치 밀려 있었다. 그때는 순리에 맡기세요(Let it be)’,‘당신 손을 잡고 싶어(I wanna hold your hand)’ 등에 매료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long and winding road)’을 듣는 경우가 더 많아지는 듯하다.

10시에 버스를 타고 호수지역(Lake District)의 중심에 있는 윈더미어(Windermere)로 향했다. 전날 리버풀로 올 때는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해 국도를 타야 했지만, 이날은 시원하게 뚫린 M58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럼에도 창밖 풍경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널따란 밭이 눈길 가는 데까지 펼쳐져 있다. 유럽대륙에서 보는 초원과는 달리, 밭과 밭 사이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숲을 이루고 있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이 지역은 산업혁명의 씨앗이 발아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이탄이 많이 생산되었던 것이 이유 중 하나다. 이탄은 우리나라 석탄과는 달리 무른 탓에 갱도를 크게 뚫을 수 없어 50~70cm 크기의 갱도만 뚫을 수 있었고 당연히 어린이를 광부로 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탄을 캐는데 강력한 동력원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증기기관이 개발된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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