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대표팀 감독은 커리어상 정점이지만 동시에 마지막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표팀 감독을 맡고 좋게 끝난 사례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박수칠 때 떠난’ 대표팀 감독은 거스 히딩크가 사실상 유일하다.
모든 감독들이 처음부터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다. 매 맞고 쫓겨난 아이 같은 신세가 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2014년 9월 부임하고 이듬해 A매치 20경기에서 16승 3무 1패의 호성적을 거뒀다. 1패는 아시안컵 결승에서 개최국 호주를 상대로 연장 접전 끝에 패한 기록이다. 그 해 슈틸리케호는 경기당 평균 0.2실점을 기록, 국제축구연맹(FIFA) 가맹국 중 가장 좋은 수비를 보여줬다. 이 외에도 17경기 무실점, 골득실 +40, 7경기 연속 무실점 등 각종 진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환호성과 야유는 일순 교차됐다. 2017년 진행된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중국, 카타르에 패하고 이란 원정전에서 유효슈팅 0개를 기록하며 시나브로 경질설이 대두됐다. 이 와중에 선수를 탓하는 발언 등이 겹치며 국내 팬들까지 등을 돌렸다. 결국 슈틸리케 감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쓸쓸히 한국무대를 퇴장했다.
이후 지휘봉을 잡은 건 신태용 감독이다. 신 감독은 짧은 준비기간 후 20세 이하(U-20) 월드컵을 치른 경험이 있다. 신 감독은 러시아월드컵 본선까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실험을 했고, 비판이 잇따랐다. 신 감독이 월드컵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야유가 쏟아졌다.
이 같은 악순환의 프레임은 김학범 감독에게도 씌워졌다. 김학범 감독은 지난 3월 23세 이하(U-23) 대표팀 지휘봉을 움켜쥐었다. 전임인 김봉길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지 한 달 만이다.
김 감독은 지도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대표적인 학구파다. 김 감독은 5개월여 동안 자신의 축구 철학을 팀에 녹여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다행히 김 감독은 취임 이전부터 U-23 대표팀에 관심을 가지고 분석을 진행했다. 축구협회는 아시안게임 성적에 따라 2020년 도쿄올림픽도 김 감독에게 맡길 생각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손흥민의 병역을 해결할 마지막 기회인만큼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김학범 감독은 취임 당시 “영광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학범 감독은 지난달 16일 아시안게임 엔트리를 발표했다.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역대급’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성인대표팀에서 중용되고 있는 손흥민(토트넘 훗스퍼), 조현우(대구 FC), 이승우(헬라스 베로나), 황희찬(잘츠부르크) 등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고, 부상만 아니었으면 월드컵에서 볼 수 있었을 김민재(전북 현대)도 포함됐다. 이에 더해 프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황현수(FC 서울), 장윤호, 송범근(이상 전북), 김진야(인천 유나이티드), 황인범(아산 무궁화) 등도 명단에 있었다.
그러나 여론은 녹록치 않았다. 와일드카드 한 장을 차지한 황의조(감바 오사카)가 발단이다. 축구팬들은 이강인(발렌시아 CF 메스타야), 석현준(트루아 AC), 백승호(CF 페랄라다) 등 한창 ‘뜨는’ 선수가 제외되고 굳이 황의조가 포함된 데에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감독은 의문 가득한 질의를 피하지 않고 조목조목 답했다. 백승호는 지난 6월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대회전까지 온전히 몸만들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이강인의 경우 지난 인도네시아 전진훈련 차출을 소속팀 발렌시아측이 거절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김 감독은 근래 육안으로 이강인의 몸 상태를 확인한 적이 없다. 이강인은 SNS를 통해 “혹사를 이유로 구단에서 차출을 반대했다”고 인정했다. 석현준은 지난 시즌 좋은 득점력을 보였으나 이후 부상 등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며 폼이 많이 떨어졌다.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하는 김 감독 입장에서 선뜻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다. 신태용 감독도 월드컵 엔트리 발표 당시 비슷한 이유로 석현준을 뽑지 않았다.
반면 황의조는 김 감독이 세운 플랜A에 적절한 자원이다. 김 감독은 아시안게임 플랜A로 3-5-2를 제시했다. 지난달 발표된 엔트리 면면을 살펴보면 측면 수비로 활용할 자원이 부족한 반면 공격진은 화려하다. 스리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로 굳건한 수비라인을 형성하고, 전방에선 선수간 시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김 감독은 전방에서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득점력까지 갖춘 공격수를 찾았고, 그 적임자로 황의조를 선택했다. 2-3일 간격으로 경기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로테이션상 황의조는 황희찬과 교대로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김 감독과 황의조는 사제지간이다. 김 감독이 성남 FC를 이끌 당시 황의조는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다. 황의조는 2015년 K리그 클래식에서 15골을 넣으며 득점 3위에 오르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황의조 발탁은 ‘인맥축구’보다 ‘효율’에 가깝다. 김 감독은 6개월 남짓한 준비기간을 거쳐 본선을 치러야 한다. 사실상 소방수 역할을 맡은 상황에서 팀 조직력을 다질 시간이 많지 않다. 선수 물색에도 충분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가운데 즉시 전력으로 황의조는 손색이 없다. 이미 과거 호흡을 맞춰봤기 때문에 황의조는 김 감독의 전술적 지시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최근 황의조만큼 폼이 올라온 한국인 공격수를 찾기 힘들다. 일본 J리그 감바 오사카에서 뛰고 있는 황의조는 이번 시즌 정규리그 9골을 넣었다. 컵 대회까지 포함하면 14골이다. 지난 주말에는 후반 36분 천금 같은 선제골을 넣으며 해결사 면모를 과시했다. 황의조는 현재 J리그 득점 5위에 올라있다. 황의조 위에는 브라질 용병 3명과 일본 간판 공격수 고로키 신조(10골)가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전무후무한 공격수 손흥민이 병역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다.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김 감독은 뻔히 보이는 인맥축구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님을 강조했다. 김 감독은 “현재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라 선발했다. 나는 학연, 지연, 의리로 선수를 뽑는 지도자가 아니다. 성적을 반드시 내야 하는 상황에서 사적인 감정으로 선수를 뽑는 건 말이 안 된다고”고 말했다.
물론 정황상 정당하다 해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이 금메달을 목에 건다면 김 감독은 최상의 스쿼드를 짰다는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부진한 끝에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면 김 감독은 인맥축구를 한 것이 된다. 슈틸리케 감독이 그랬고, 숱한 대표팀 감독들이 그랬다. 평가는 오로지 결과에 의해 판가름 난다.
이다니엘 기자 dn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