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종영한 JTBC ‘SKY 캐슬’에서 가장 큰 변곡점을 만들어낸 인물은 김혜나(김보라)다. 처음에는 이름만 등장했다. 강준상(정준호)-한서진(염정아)의 딸 강예서(김혜윤)가 유독 싫어하는 같은 반 라이벌의 이름이 김혜나였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다. ‘SKY 캐슬’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한서진, 김주영(김서형)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당돌한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적인 결말이 드라마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쿠키뉴스와 만난 배우 김보라는 드라마의 성공에 들뜨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후회 없이 했을 뿐이란 당당한 태도는 극 중 혜나를 떠올리게 했다. 김보라는 처음 대본을 본 순간부터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캐릭터로 해석했다. 그래야 후반부에 가도 어른들과 맞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대한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혜나도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린 면이 있겟죠. 하지만 그 모습이 비춰지는 순간 어른들과 기 싸움에서 지고 무시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혜나는 드라마의 ‘최종 보스’인 김주영 선생님의 약점마저 손에 쥐고 흔드는 중요한 인물이잖아요.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혜나가 점점 당돌해져서 저도 가끔 너무 얄미운 것 아닌가, 꼭 이래야 하나 싶기도 했어요. 제가 우려했던 부분을 언급한 댓글도 봤고요. 처음엔 속상했지만, 어떻게 보면 잘 표현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선한 이미지만 보여줬다면 혜나가 덜 강해보였을 것 같거든요. 전 혜나에 대한 평이 갈리는 것도 좋았어요.”
김보라가 기억하는 혜나의 죽음은 특별했다. 원래 대본에는 누구인지 모르게 엎드려 있는 모습만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조현탁 감독이 혜나의 얼굴을 직접 보여주길 원했다. 당시 얼굴에 피를 흘린 분장을 하고 누워서 엔딩 장면을 찍던 김보라는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전 혜나가 정말 끔찍하게 죽었다고 생각해요. 피 분장을 하고 촬영을 하니까 저도 모르게 혜나의 입장이 되더라고요. 진짜 억울했어요. 저는 제 방식대로 열심히 살려고 한 건데 안타깝고 억울했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찍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사실 혜나의 죽음이 이렇게 크게 이슈가 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혜나를 누가 죽였는지, 자살인지 타살인지 궁금해 하시더라고요. 대본을 쓴 작가님도 대단하시지만, 편집하신 감독님도 대단하세요. 원래 그 엔딩이 아니었는데 감독님이 편집하면서 바꾸신 거예요. 제게 ‘내일 엔딩 기대해도 좋다’고 하셨죠. 방송을 보고 저도 충격이었지만, 저희 가족들도 충격을 받았어요. 가족들은 혜나와 막내딸인 제 이미지가 겹쳐서 보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죽는 모습을 보고 더 놀랐고, 마음 아팠다고 하셨어요.”
김보라는 ‘SKY 캐슬’에서 자신의 연기를 보며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그의 눈에도 혜나를 연기하는 김보라가 아닌 혜나가 보였다. 그만큼 치밀하게 혜나 캐릭터를 분석하고 몰입해서 촬영했다는 얘기다. 아역부터 15년 동안 자신을 지켜봐준 팬들과 가족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확실히 연기가 많이 늘은 것 같아요. 이제야 제대로 된 성인 연기자가 된 느낌이에요. 제 자랑 같지만 전 최대한 김보라로서 잘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실 실제 김보라는 부끄럼도 많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연기할 때는 최대한 김보라를 숨기려고 해요. 사람들이 김보라가 아닌 극 중 인물로 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오히려 숨으려고 해봤자 감정도 안 올라오고 잘 안되더라고요. 뻔뻔하게 할수록 잘 되는 것 같아요.”
극 중에선 고등학생 역을 맡았지만 실제 김보라는 1995년생으로 20대 중반이다. 아역 배우 출신에 어려보이는 얼굴 덕분인지 김보라는 20대가 된 이후에도 줄곧 고등학생 역할을 맡아왔다. 매번 똑같은 학생 역할에 오디션도 번번이 떨어지자 슬럼프가 찾아왔다. 언제까지 배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그만의 방법으로 극복하고 배우의 일을 즐기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2017년 tvN 드라마 ‘부암동 복수자들’에 출연하기 전에 많이 쉬었어요. 주변에서도 제가 이렇게 오래 쉰 건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죠. 당시에 오디션도 많이 봤는데 정말 전부 불합격이었어요. 스스로가 작아지고 조급해지더라고요. 난 언제까지 학생 역할을 해야 되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막연한 생각만 들었어요. 그 시간 동안 이미지가 강한 분들의 인터뷰나 작품을 많이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 이제 고작 스물 셋인데 너무 섣부른 판단을 했구나 싶었죠. 예전엔 욕심도 없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지 했다면, 그때부터 긍정적으로 바뀌었어요. 또 제가 출연한 작품 영상으로 프로필을 만들고 단편 영화 오디션을 지원했어요. 단편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힘들어도 끝나면 또 새로운 단편을 찾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 직업을 정말 좋아하게 됐구나 싶었죠. 어느 순간 제가 일을 즐기고 있더라고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박효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