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여덟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5-09 23:00:00

다시 리프트를 타고 포도원 위를 날아 뤼데스하임 마을로 돌아갔다. 내려가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라인 강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은 지붕이 회색이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붉은 지붕을 가진 것과 비교된다. 강변으로 네모난 탑 모양의 건물이 눈에 띈다. 부젠부르그(Boosenburg)라는 이름의 성이다. 12세기 말 뤼데스하임의 기사였던 푸흐스경 가문에서 지었다. 정사각형의 높다란 망대 모양의 건물로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였다. 중세 무렵 거처한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1407년 뤼데스하임의 귀족 브룀저(Brömser) 가에 넘겨졌다가, 1474년부터 1830년까지는 발데크의 부스(Boos von Waldeck) 가문의 것이었다. 1830년 쇤보른-비슨테이트(Schönborn-Wiesntheid)에게 넘어간 뒤 다른 건물을 모두 철거하면서 망대는 더 높이고, 총안 사이를 고딕양식으로 추가했다. 

다음 주인이 된 와인상인 밥티스트 스투름(Baptist Sturm)은 해자를 손질해 궁륭형의 와인저장고로 만들었다. 그의 사후 아내는 고딕양식의 빌라를 지었다. 부젠부르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룀저부르그(Brömserburg)성이 있다. 라인강 왼쪽의 망루로 4세기경의 로마의 요새 위에 건설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1186년에서 1190년 사이에 건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뤼데스하임은 목조주택과 옛 숙박업소 그리고 자갈을 깔은 좁은 거리가 잘 보존돼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뤼데스하임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드로셀가세(Drosselgasse, 티티새의 거리라고 부른다)를 찾는다. 티티새는 지빠귀라고도 부르는 새다. 그리 길지 않은 드로셀가세에는 예쁜 기념품가게와 식당들이 이어져있다. 우리 일행은 드로셀가세 안에 있는 식당 드로셀호프(Drosselhof)에서 슈니첼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슈니첼(Schnitzel)은 ‘음식을 얇게 썬 조각’이라는 의미의 중세 고지 독일어, 슈니츠(Sniz)에서 유래된 단어다. 망치로 두들기거나 연육제 등을 이용해 고기를 연하게 한 다음 밀가루, 빵가루, 달걀 등을 섞어 표면에 바르고 기름에 튀겨낸다. 송아지고기, 양고기, 닭고기, 쇠고기, 칠면조고기, 돼지고기 등 다양한 고기를 재료로 사용한다. 본래 오스트리아의 전통 음식이었던 것이 프랑스로 전해지면서 포크커틀릿(Pork Cutlet)이 됐고, 이것이 일본에 전해져 ‘돈가츠’로,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돈가스가 됐다. 그러니까 슈니첼은 돈가스의 원조인 셈이다.

드로셀호프는 겉에서 보기에도 오래된 분위기가 물씬 나는데, 1727년에 문을 열었다니 거의 300년 된 집이다. 그리고 보니 이 동네에서는 적어도 100년은 넘어야 좀 됐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나 보다. 쾰른에서 점심에 먹은 슈니첼이 닭을 튀긴 것이었다면 드로셀호프에서는 돼지고기를 튀긴 슈니첼이었다. 이 거리의 식당들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밴드연주가 있다는 것이다. 

2인조 밴드인데 우리나라에서 연주하는 필리핀밴드 생각이 났다. 이날 연주에는 우리나라 노래는 없었고 영어가사도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는 느낌이다. 이른 시간이라서 손님은 없었지만 우리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 두 분이 무대 앞에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즐겁게 사시는 모습이 부러웠다. 

식사를 마치고서 6시반경 뤼데스하임을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뤼데스하임에는 몇 가지 박물관도 볼만하다. 지그프리드 기계악기 박물관(Siegfrieds Mechanisches Musikkabinett)에서는 음악을 자동으로 재생하는 기계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가 개발돼온 과정을 볼 수 있다. 중세 고문박물관(Mittelalterliches Foltermuseum)에서는 중세에 사용됐던 다양한 고문도구를 전시하고 있다. 아스바흐(Asbach) 증류소는 아스바흐 우랄트(Asbach Uralt) 생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브랜디 박물관이다. 

뤼데스하임를 출발한 버스는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8시 무렵,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이날 숙소도 전날과 같은 NH호텔이었다. 서머타임을 적용하기 때문에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호텔에 도착한 버스가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까지 들어가 세우는 바람에 주차장에서 로비까지 무거운 짐을 끌고 가야 했다. 

교통의 흐름에 문제가 없으면 로비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승객들을 내리게 해 이동에 어려움이 없게 하는 편인데, 우리 버스를 운전하는 독일인 기사는 원칙주의자인가 보다. 아니면 낮에 뤼데스하임에서 인솔자와 다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나 싶었다. 숙소 부근엔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일찍 쉬었다.

독일 구경에 나선 두 번째 날이다. 전날 밤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탓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꽤 오래 잤다 싶었지만 막상 눈을 뜨고 보니 3시 반이었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전날 메모해둔 일정을 정리해뒀다. 해외여행에서 숙면은 원기를 회복해 다음 날 일정을 씩씩하게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다. 하지만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다. 

이 날은 8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6시에 일어나 씻고 식사를 해야 한다. 짐을 챙겨 버스를 타며 기사에게 ‘구텐 탁(guten Tag)’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전날은 ‘굿모닝’이라는 인사에 모른척하던 기사가 이날은 달라졌다. 아침인사는 ‘구텐 탁(guten Tag)’이 아니라 ‘구텐 모르겐(guten Morgen)’이라고 해야 한단다. 잘못 쓴 독일어를 고쳐줘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그나저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석·박사 과정에서 독일어 시험을 몇 차례나 치렀는데도 아침인사와 낮 인사를 헷갈렸다니 참 한심하다. 

오늘 구경하게 되는 하이델베르크는 염소(goat)와 산(mountain)을 의미하는 방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어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에서 78㎞ 남쪽에 있는 하이델베르크는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에 속하는 대학 도시다. 라인 강의 지류인 네카르(Neckar) 강이 도심을 지난다. 

2016년 인구통계에 따르면 16만명이 살고 있는데, 인구 4분의 1이 학생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하이델베르크에 대해 “나는 완벽하게 맑은 아침, 상쾌한 공기가 서늘하면서도 활기를 돋우는 가운데 하이델베르크를 보았습니다.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완벽하기 때문에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07년에 하이델베르크 가까운 마우에르(Mauer)에서 발견된 하이델베르크인은 60만년 전에서 20만년 전 사이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델베르크인은 유럽대륙에 정착한 초기 인류다. 성산(聖山)이라는 의미의 하이리겐베르크 (Heiligenberg)에 있는 요새와 예배당은 기원전 5세기 무렵 이 지역에 들어온 켈트족이 세운 것이다. 

서기 40년에는 이곳에 진주한 로마군이 요새를 지었다. 하이델베르크 지역은 서기 260년 게르만족이 진입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영토였다. 로마제국 시절에는 인근에 있는 로포두눔(Lopodunum)이 행정의 중심이었다. 서기 369년에 비잔틴제국의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I)황제는 넥카르 강변에 성과 감시탑을 지었다.

1196년에 작성된 쇤나우(Schönau) 수도원의 문서에서 하이델베르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쇤나우(Schönau) 수도원은 1142년에 네카르 계곡에 세워졌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의 중심에 있는 베르그하임(Bergheim) 마을에 대한 언급은 서기 769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하이델베르크는 서기 5세기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155년에 호헨스타우펜 가문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소유하게 됐고, 호헨스타우펜 가문의 콘라드(Conrad)가 라인강의 팔라틴(Pfalzgraf bei Rhein) 백작으로 선제후가 됐다. 1195년에는 결혼으로 팔라틴 선제후가 벨프(Welf) 가문으로 넘어갔다가, 1214년에는 바바리아 공작 루트비흐 1세(Ludwig I)에게 넘겨졌다.

1386년 팔라틴 선제후 루페르트 1세(Rupert I)가 설립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프라하대학, 비엔나 대학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시절 세워진 세 번째 대학이다. 1518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95개의 테제(Theses)를 발표한 몇 달 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5~16세기의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시기에 칼빈주의와 갈등을 빚은 루터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주도했다. 1559년에서 1576년 사이 팔라틴 선거후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학부 교수들을 이끌고 새로운 교리문답을 완성했다. 그는 가톨릭 중심의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루터교의 영향력을 키우려 노력했다. 

1619년 팔라틴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ederick V)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합스부르크가와 갈등을 빚었고, 1621년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1622년 틸리(Tilly) 백작 요한 테세라클(Johann Tserclaes)이 이끄는 가톨릭 연맹군이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했다. 

스웨덴,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군대가 하이델베르크를 두고 각축을 벌인 끝에 1648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루트비히(Karl I. Ludwig)가 주도해 하이델베르크를 탈환하고 다시 팔라틴 선제후가 됐다. 그는 프랑스 왕실과 결혼을 통해 세력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사후에 오히려 분란이 일어났다. 가톨릭을 신봉한 루이 14세가 상속권을 주장하며 1689년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했고, 1693년 프랑스 점령군이 도시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2008년 기준으로 방문교수를 제외한 정규 교수가 4196명이고, 유학생 5118명을 포함해 총 2만6741명의 학생이 등록돼있다. 2017년에는 모두 56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대학에 소속돼 교육과 연구를 수행할 정도로 탄탄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12개 학부에서 100여개 학과가 개설돼있는데, 3개의 주요 캠퍼스로 나뉘어 있다.

인문학 분야의 학과는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의 캠퍼스에, 자연과학과 의학 분야는 노이엔하이머 펠트(Neuenheimer Feld)의 캠퍼스에, 사회과학 분야는 베르그하임(Bergheim) 캠퍼스에 주로 위치한다. 약 670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대학도서관은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