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님이 ‘넌 기정이인 것 같아. 나중에 시나리오 보면 알게 될 거야’라고 하셨죠. 시나리오를 보니 대사가 정말 제 말투와 비슷하게 쓰여있더라고요”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박소담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말투로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얘기를 이어갔다. 1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봉준호 감독의 출연 제안이 왔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시나리오도 없고 제목도 모르는 봉 감독의 영화의 시작은 알고 지내던 의상 감독의 전화였다.
“처음엔 의상 감독님 번호로 연락이 왔어요. 받았더니 봉준호 감독님이 저를 뵙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감독님을 만났고 송강호 선배님의 딸로 나오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해주셨어요. 사실 전 감독님께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놀라고 벅찬 기분이잖아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거절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하셔서 무슨 말씀이시냐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시나리오가 나온 상태도 아니어서 이게 진짜 하는 건가 싶고 얼떨떨했어요. 그렇게 첫 만남 이후 두 달이 지났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 거예요. 당시 제가 소속사도 없어서 불안하더라고요. 왜 연락이 없지 생각했는데 다시 연락이 닿아서 감독님을 만났어요. 제가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고 왜 이렇게 연락을 한참 뒤에 주셨냐고 했더니, 감독님이 시나리오 쓰느라 그랬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하자고 했으면 하는 건데 왜 불안해하냐는 말씀도 하셨어요. 내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더라고요.”
박소담은 ‘기생충’에서 전원 백수인 기택(송강호) 가족의 막내 기정 역할을 맡았다. 미술에 재능이 있지만 꿈을 펼칠 기회가 없던 그녀에게 과외교사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기정은 연교(조여정)을 감쪽같이 속이고 신뢰를 얻는다. 박소담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정의 자신감이 사실은 약한 내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기정이가 가진 게 가장 없는 친구인 것 같아요. 겉으로는 가장 자신감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전 반대로 기정인 가장 약한 존재인 것 같아요.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요. 기정이가 계속 취업에 실패하면서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겠어요.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티 한 번 안냈을 것 같아요. 기정이가 겉으로는 항상 웃고 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지만 사실 제일 외로운 친구 아니었을까요. 제가 생각한 기정이만의 공간도 방이 아닌 화장실 변기라고 생각했어요. 실력은 있었지만 계속 뭔가 맞지 않던 기정이가 취업이 되면서부터 완벽한 무언가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연교의 아들인 다송이를 파악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돌보게 된 것 같아요. 거기서 기정이의 힘을 느꼈죠.”
박소담은 인터뷰 도중 ‘아버지’와 ‘아빠’를 구분해서 표현했다. 극중에서 아버지 기택 역할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아버지’였고, 현실에서의 아버지는 ‘아빠’라고 불렀다. 박소담식 호칭은 평상시에도 이어졌는지 “아빠가 ‘너네 아버지 짱이다’라고 하셨어요”라고 할 정도로 가족들도 부르게 됐다. 그만큼 영화 ‘사도’에 이어 다시 만난 송강호가 편하게 대해줬다는 얘기다.
“송강호 선배님은 ‘사도’에서 만났어요. 그때는 아주 가까운 관계였지만 대사를 주고받거나 연기호흡을 맞출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3회차 밖에 촬영을 안했으니까요. 그때도 절 많이 챙겨주시면서 ‘다음에 꼭 또 만나자’ 하셨는데, ‘기생충’에 저희 아버지로 나온다고 들으니까 처음부터 마음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역시나 선배님과 연기를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도 다 받아주시고 다 들어주시니까 연기하는 게 정말 재밌었다. 이렇게 호흡을 주고받을 수가 있구나 느꼈죠. 가족으로 나와서 너무 좋았고 지금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해요.”
박소담은 ‘기생충’ 이전에 1년 정도 공백기를 가졌다고 털어놨다. 처음부터 쉬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출연할 작품이 없는 시기이기도 했고 휴식이 필요한 시기라고 느꼈다. 데뷔작인 ‘검은 사제들’에 출연할 때까지 쉬지 않고 오디션을 봤다. 많게는 한 달에 오디션을 17번 볼 때도 있었다. 이후 출연한 ‘사도’와 ‘경성학교’도 당시 오디션에서 붙은 영화였다. 쉬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을 되찾았다. 이제 다시 연기를 하면 잘 해낼 수 있겠다 싶을 때쯤 연락온 작품이 ‘기생충’이었다.
“이전까지는 작품에 폐 끼치지 말고 내 연기를 정말 잘 해내자고 생각했어요. 잘하고 싶다고,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죠. 현장을 즐겼던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기생충’을 할 때는 전체 스태프들 얼굴이 다 보였어요. 스태프 이름까지 다 외운 현장은 처음이었죠. 이전까지는 제 스스로를 압박했고, 영화 시스템도 잘 몰랐어요. ‘기생충’을 하면서 송강호 선배님이 많이 알려주셨어요. 영화 한편이 만들어지기 위해 뒤에서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줄 몰랐던 거죠. 내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는데 그동안 그걸 모르고 연기했으니… 그런 부분을 알고 연기하니까 너무 행복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전보다 더 많이 보이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제가 현장을 이렇게 즐겼던 적은 처음이에요. 선배님들이 넌 왜 이렇게 항상 신났냐고 물으실 정도였으니까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