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이 고3 딸이 있는 아버지 역할을 맡기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하시길래 바로 제가 염색을 안 하면 흰머리가 많다고 했어요. 뭐든 시켜주시면 다 하겠다고 했죠.”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선균은 봉준호 감독과의 첫 만남을 유쾌하게 회상했다. 배우 송강호와 함께 셋이 만난 첫 미팅 자리에서 곧바로 캐스팅 제의를 받은 당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봉준호 감독이 이선균의 화보 사진을 봤다고 했다. 영화 ‘악질경찰’ 개봉 당시 찍은 화보 사진 속 이선균은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영화 ‘기생충’을 촬영하면서도 봉 감독은 이선균에게 많이 피곤하고 예민한 모습을 주문했다고 했다.
“박 사장은 기존 부자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IT 기업 대표라는 건 상속은 재산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서 벤처 사업을 성공시킨 거잖아요. 부자지만 그렇게 구시대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강박감이 있는 거죠. 직원이나 사람들을 대할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선에 예민한 것 같아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어떻게 보이는지 중요해서 열심히 사는 인물이죠. 가족들에게도 소홀히 하기 싫어하는 것 같고요. 그 안에 천박함과 쪼잔함을 내재하고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선균은 인터뷰 도중 송강호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소감을 여러 번 얘기했다. “신기했다”, “너무 좋다”는 감탄사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마지막 가든파티 장면에서 송강호의 표정이 변하는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그 장면에서도 제가 선을 넘는 걸 싫어하는 설정이기 때문에 포인트를 짚고 넘어간 거예요. 강호 형과 연기하면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좁은 공간에서 형과 얘기하는 장면이었는데 전 그렇게 디테일하게 연기할 줄 몰랐어요. 얼굴 색깔까지 변하는 연기가 너무 좋더라고요. 정신없이 부분부분 나눠서 찍다 보니까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놀랐어요. 송강호 형님과 호흡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도 했어요.”
이선균은 자신의 분량이 생각보다 적었다고 장난처럼 토로하기도 했지만, ‘기생충’ 후반부의 정서는 이선균이 이끌어간다. 그가 극 중에서 언급하는 ‘선’과 ‘냄새’의 개념은 관객들의 머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기택(송강호)의 가족 위주로 그려지던 세계가 박 사장 가족의 세계로 확장된 이후 정면으로 부딪치는 지점이다. 이선균은 두 가지 모두 보이지 않는 개념이란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선을 넘는 걸 싫어한다는 얘긴) 박 사장뿐 아니라 극 중 모든 인물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보이지 않지만 각자 정해놓은 것들이 있잖아요. 자기 방어막이자 자존감인 거죠. 우리가 계급사회에 사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선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들도 있을 거고요. 박 사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선과 냄새, 두 가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에요. 그냥 제가 정해놓은 거죠. 그래서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정해놓고 살지 않았나 고민해보기도 했어요. 그런 지점을 얘기하는 영화인가 싶어 한 번 돌이켜보기도 했고요.”
최근 작품에서 가장 앞장서서 극을 이끌어가던 이선균이 뒤로 물러난 연기를 펼친 건 오랜만이다. 덕분에 주인공을 맡은 영화를 홍보하는 것보다 부담도 덜하다며 웃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계획을 짠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라는 말도 했다.
“마음이 편한 것도 있었어요. 기존 작품들에서 했던 포지션이나 방식과 다른 것 때문에 약간의 이질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100% 감독님을 믿었고, 현장이 너무 좋았어요. 마치 패키지여행 같았어요. 제가 여행을 직접 기획해서 떠나면 두려움이 있잖아요. ‘기생충’에선 그런 것 없이 정말 잘 즐기고 온 것 같다. 너무 함께해서 약간 지친 것도 있지만 정이 많이 들어서 정말 그리울 것 같아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