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낯설었다. 거실에서 수평선이 보이고 집 뒤로는 저 멀리 한라산 백록담을 향한 오름들과 그 아래 모여 있는 빨간 지붕의 집이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 먼 곳까지 바라본 적이 있던가. 집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 양쪽에 검은 돌로 거칠게 쌓아 둔 얕은 담과 그 담을 지나 집 가까이에 오면 오른쪽에 울창하게 자라는 나무 역시 늘 보았던 풍경은 아니었다.
며칠 드나들며 눈에 익히다가 이 나무들이 후박나무, 아왜나무 그리고 까마귀쪽나무임을 알아냈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후박나무, 아왜나무, 까마귀쪽나무’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지만 여전히 가까이 보던 나무는 아니다. 종일토록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문득 내려다보면 집 앞의 길가로 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이곳은 지금까지 살던 곳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떨림이 있는 기분 좋은 이 생경한 느낌이 곧 익숙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다.
생각해 보니 스물일곱 살의 봄에 걸어 올라간 대학교 캠퍼스도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설고 편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밝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간 함께 일해 왔던 이들과는 말투도, 쓰는 단어도, 억양도 달랐다. 입학 동기생들은 나이가 여덟 살까지 어리니 그들 가운데서 나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기름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삼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그 때가 익숙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십대 마지막 해에 시작한 직장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벗어나기만을 학수고대했는데 막상 다른 길 위에 서고 보니 거기 함께 서 있는 다른 사람과는 섞이지 못하고 은근한 걱정과 두려움이 저 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책임져야 할 나이에 거꾸로 다시 짐이 되었으니 자식의 도리도 형의 도리도 아니었다. 가족들의 희생은 적어도 4년은 더 계속되어야 했으니 그 미안함이란...
머릿속에 한 덩어리 검은 구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나름 대학생활은 만족스럽게 시작했다. 적어도 생소한 환경이 주는 떨림이 있었고 한 주일의 일정을 계획해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날은 내가 이십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읽어서 알고 있었던 세상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날은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 읽어야 할 것에만 충실했던 지난날들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한 날이었다.
대학생활 첫 학기를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갈 무렵 한 무리의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그 박자에 발맞추어 걷고 있었다. 어깨동무 행진이 잦아지던 어느 날 그들이 부른 노래 가사가 또렷이 들려왔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빈 터엔 광주에서의 험악하고 살벌한 장면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국립고등학교를 다녔고 공무원으로 살았고 33개월의 군 생활을 했고 다시 공무원으로 복직해 근무하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군에 입대해 신병 훈련 마치고 근무할 부대에 배치되어 가서 며칠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총을 맞았다. 몇 달 동안 군화를 신을 채 잠을 자다가 첫 휴가를 나왔더니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OOO가 대통령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해 1980년 봄 ‘광주에서 남파간첩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침을 소지한 간첩이 광주로 향하다 체포되고 무장한 폭도가 광주를 장악하고...
남들과 똑같이 보고 듣고 살아왔는데 내가 보고 들은 나라와 여기 이들이 보고 들은 나라는 전혀 달랐다. 내 눈은 뜨고 있었는데도 뜬 것이 아니었다. 내 귀로 듣고 있었는데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보라는 것만 보고 들으라는 것만 듣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서예를 배우며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은 전시회 준비 중 우연히 만난 글귀 思無邪(사무사)였다. 단순히 풀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음'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수록된 ‘詩三百 一言而蔽之 曰 思無邪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에 나온 말이다.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로 풀이한다.
이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읽기와 쓰기 겨우 깨치고 덧셈과 뺄셈을 배운 내 부모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 부모는 세상 어디에 가서도 남에게 해가 되는 언행을 할 줄 몰랐고 자식들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해 어느 순간이고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 역시 평생 그렇게 살려 애썼다. 그러나 내 부모만큼은 못했다. 아직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다 내려놓고 훌쩍 제주도로 내려와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또 시간을 보내고 주차장으로 가 보니 어딘가 낯선 곳이다. 다른 주차장이 또 있는지 직원에게 물었다. 이곳 하나뿐이라 한다. 숲속에서 길을 물었을 때 우리는 이미 한라생태공원 구역에 있었고 그들은 당연히 한라생태공원 주차장을 알려준 것이었다. 절물자연휴양림과 한라생태공원이 거의 접해 있음을 모르고 무턱대고 걸은 결과였다. 절물자연휴양림의 탐방로를 어디서 벗어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대기하고 있는 택시는 없었다. 버스를 이용해 한라생태공원에서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 방법이 최선이란다. 오후 4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때로 길을 물으며 좌우 살피지 않고 걸어 두 시간 만에 다시 원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는 새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