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낯설지만 익숙해져야 할 나무와 숲 그리고 물과 바다

‘제주도에서 1년’…낯설지만 익숙해져야 할 나무와 숲 그리고 물과 바다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세 번째

기사승인 2019-08-03 00:00:00

제주도는 낯설었다. 거실에서 수평선이 보이고 집 뒤로는 저 멀리 한라산 백록담을 향한 오름들과 그 아래 모여 있는 빨간 지붕의 집이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 먼 곳까지 바라본 적이 있던가. 집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 양쪽에 검은 돌로 거칠게 쌓아 둔 얕은 담과 그 담을 지나 집 가까이에 오면 오른쪽에 울창하게 자라는 나무 역시 늘 보았던 풍경은 아니었다.
며칠 드나들며 눈에 익히다가 이 나무들이 후박나무, 아왜나무 그리고 까마귀쪽나무임을 알아냈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후박나무, 아왜나무, 까마귀쪽나무’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지만 여전히 가까이 보던 나무는 아니다. 종일토록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문득 내려다보면 집 앞의 길가로 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이곳은 지금까지 살던 곳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떨림이 있는 기분 좋은 이 생경한 느낌이 곧 익숙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다.
생각해 보니 스물일곱 살의 봄에 걸어 올라간 대학교 캠퍼스도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설고 편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밝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간 함께 일해 왔던 이들과는 말투도, 쓰는 단어도, 억양도 달랐다. 입학 동기생들은 나이가 여덟 살까지 어리니 그들 가운데서 나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기름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삼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그 때가 익숙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십대 마지막 해에 시작한 직장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벗어나기만을 학수고대했는데 막상 다른 길 위에 서고 보니 거기 함께 서 있는 다른 사람과는 섞이지 못하고 은근한 걱정과 두려움이 저 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책임져야 할 나이에 거꾸로 다시 짐이 되었으니 자식의 도리도 형의 도리도 아니었다. 가족들의 희생은 적어도 4년은 더 계속되어야 했으니 그 미안함이란...
머릿속에 한 덩어리 검은 구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나름 대학생활은 만족스럽게 시작했다. 적어도 생소한 환경이 주는 떨림이 있었고 한 주일의 일정을 계획해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날은 내가 이십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읽어서 알고 있었던 세상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날은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 읽어야 할 것에만 충실했던 지난날들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한 날이었다.

대학생활 첫 학기를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갈 무렵 한 무리의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그 박자에 발맞추어 걷고 있었다. 어깨동무 행진이 잦아지던 어느 날 그들이 부른 노래 가사가 또렷이 들려왔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빈 터엔 광주에서의 험악하고 살벌한 장면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국립고등학교를 다녔고 공무원으로 살았고 33개월의 군 생활을 했고 다시 공무원으로 복직해 근무하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군에 입대해 신병 훈련 마치고 근무할 부대에 배치되어 가서 며칠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총을 맞았다. 몇 달 동안 군화를 신을 채 잠을 자다가 첫 휴가를 나왔더니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OOO가 대통령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해 1980년 봄 ‘광주에서 남파간첩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침을 소지한 간첩이 광주로 향하다 체포되고 무장한 폭도가 광주를 장악하고... 
그 후 소문의 그 OOO이 정말 대통령이 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고 경제는 3저 호황에 힘입어 큰 폭으로 성장하고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태평성대의 시절에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의 그 비극을 ‘광주사태’로 부르면 안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과 똑같이 보고 듣고 살아왔는데 내가 보고 들은 나라와 여기 이들이 보고 들은 나라는 전혀 달랐다. 내 눈은 뜨고 있었는데도 뜬 것이 아니었다. 내 귀로 듣고 있었는데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보라는 것만 보고 들으라는 것만 듣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나이 차이도 크고 세상 바라보는 눈도 다르니, 어차피 많은 동료학생들과 어울리는 대학생활이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오래 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서예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캠퍼스에서의 내 동선은 강의실과 서예동아리방과 도서관으로 좁혀졌다. 이 서예동아리에서 나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산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방학 때면 다른 학교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예강좌가 열리곤 했다. 연세 지긋한 여성이 글씨를 배우러 다니고 있었다. 먹을 갈며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전 세상 일 중에 돈 버는 일이 제일 어려운 듯합니다.” “나는 오히려 돈 버는 일이 제일 쉬운 듯해요.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식 키우는 일이었어요. 자식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서예를 배우며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은 전시회 준비 중 우연히 만난 글귀 思無邪(사무사)였다. 단순히 풀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음'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수록된 ‘詩三百 一言而蔽之 曰 思無邪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에 나온 말이다.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로 풀이한다.

이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읽기와 쓰기 겨우 깨치고 덧셈과 뺄셈을 배운 내 부모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 부모는 세상 어디에 가서도 남에게 해가 되는 언행을 할 줄 몰랐고 자식들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해 어느 순간이고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 역시 평생 그렇게 살려 애썼다. 그러나 내 부모만큼은 못했다. 아직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다 내려놓고 훌쩍 제주도로 내려와 있으니 말이다.
함덕에 마련한 집에 추가로 필요한 집기와 생활용품을 사들이고 주민등록 주소까지 옮겨 제주도민이 되었다. 틈틈이 가까운 해안을 걷고 살피며 며칠 지내다가 문득 중산간지역이 궁금해졌다. 일주일째 되는 날 ‘절물자연휴양림’을 찾아갔다.
하루하루가 부지런을 떨 까닭 없는 날이므로 서두르지 않으니 오전이 끝나갈 무렵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안내 팸플릿을 슬쩍 살펴보니 제일 긴 탐방 코스가 11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3시간쯤 걸릴 것이나, 사진 촬영 하느라 멈칫거리면 4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길 입구에 들어서니 이미 양쪽의 울울창창한 삼나무 숲이 깊었다. 숲 냄새가 훅 풍겨왔다. 샛길로 들어서면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길인지 나와 아내만 남았다. 어느 덧 덤불과 나무가 우거진 동굴 같은 길이 나오더니 솔숲을 잠깐 지나 다시 삼나무 숲이 나온다. 까마귀와 멧비둘기와 다른 산새들이 따라오며 끝없이 지저귄다. 숲의 축축한 공기와 냄새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길은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나와 아내가 이 숲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왔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난 것으로 보아 꽤 멀리 온 것은 분명하니 이쯤에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제주에 와서 처음 걷는 숲길에서부터 엉뚱한 길로 빠져 고생하기는 싫었는데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저쪽에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탐방객이 보였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자기들이 온 방향의 길로 가면 그리 멀지 않다고 알려준다. 가는 길을 알았으니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숲을 살피며 걸었다. 숲을 벗어나면서 잘 꾸며진 정원이 나타난다. 주제별로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어 꽃과 풀과 나무를 살피며 그 이름을 알아가기에 편리했다.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의 연리목 안내 간판도 예사롭게 보아 넘겼다.

그렇게 또 시간을 보내고 주차장으로 가 보니 어딘가 낯선 곳이다. 다른 주차장이 또 있는지 직원에게 물었다. 이곳 하나뿐이라 한다. 숲속에서 길을 물었을 때 우리는 이미 한라생태공원 구역에 있었고 그들은 당연히 한라생태공원 주차장을 알려준 것이었다. 절물자연휴양림과 한라생태공원이 거의 접해 있음을 모르고 무턱대고 걸은 결과였다. 절물자연휴양림의 탐방로를 어디서 벗어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대기하고 있는 택시는 없었다. 버스를 이용해 한라생태공원에서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 방법이 최선이란다. 오후 4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때로 길을 물으며 좌우 살피지 않고 걸어 두 시간 만에 다시 원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는 새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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