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만 두 번째 태풍을 겪었다. 이제야 제주에 부는 바람의 위력이 보인다. 태풍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아침 뉴스를 듣고 나서 바람과 함께 퍼붓기 시작한 비는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중창을 굳게 닫았는데도 밤새 바람 지나가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어 내다보니 멀리 함덕 해변의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름드리 곰솔이 흔들리고, 작은 나무들은 곧 꺾어질 듯 이리 휘고 저리 휘었다. 어둠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는 잦아들었다.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드셌다.
태풍이 아니더라도 비는 늘 바람과 함께 내렸다. 아니 날렸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엔 집에서 소리를 듣고 흔들리는 나무와 날아가는 빗줄기를 보며 귀와 눈으로 그 힘을 느낀다. 우산과 우비는 물론이고 차를 타고 나가도 어차피 이 비바람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니, 이런 날엔 가만히 앉아 책 읽고, 비바람 그치면 가볼 곳을 찾아보고, 먼저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함덕 해변 근처의 헌책방에서 사온 책은 제법 읽을 만하고 아직 거기에 많이 있으니 비바람이 몇 날이고 그치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며칠 일정의 여행이나 한 달 살기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여유를 1년 살기를 통해 누린다.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마지막 면접 후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갔디?’하고 물어왔을 때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예.’라 답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20대 초반부터 뼈가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온갖 험한 일을 다 헤치며 살아온 내 부모님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이곳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곳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11월 중순 첫 출근하던 날 나름 서둘러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사무실에 들어서기도 전 알아본 여직원들이 인사를 한다. 내가 일하게 될 책상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내 앞에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직장에서 누군가 준비해 주는 커피는 이날 처음 받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여기엔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시고 싶을 때 내가 편안히 준비해서 마시겠다고 말을 했다. 점심 식사 후 인스턴트 커피를 찾아 마실 준비를 하는데 이번엔 여직원들이 당혹해 한다. 보름쯤 지나서야 서로 익숙해질 수 있었다.
12월 1일 비서실장 겸 홍보실장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는 타블로이드판 4 페이지의 병원소식지와 일 년에 4번 발행하는 학술지 발행이 당장 시작해야 할 업무였다. 그 외엔 시간 나는 대로 1970년대 중반부터 발행했던 옛날 소식지와 1960년대부터 모아둔 백병원 관련 신문기사를 꺼내서 읽으며 백병원을 알아가고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이사장실에 들어가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잠시 앉아보라 한다.
“오 실장, 왼손 한 번 내밀어 봐요.”
이사장이 내 손목을 만져보고는 말을 잇는다.
“그렇군. 이 시계 차고 다녀요.”
“예. 감사합니다.”
고 백낙조 이사장은 마음 씀씀이가 깊은 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는지 여러 번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시계를 준비하고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손목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연말 선물이라며 내게 주었다.
“미스터 맥파슨이라고 알아요?”
“예. 대학교 다닐 때 4년 동안 그 교수님께 영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집에 사는 것도 알겠네?”
그때서야 내가 백병원 비서실에 오게 된 계기를 어렴풋 짐작했다. 우리네 삶은 늘 준비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다.
추석 후에 제주로 돌아오니 주말 태풍 소식이 들여온다. 겨우 열흘이었는데 그간 다녔던 제주의 숲이 보고 싶었다. 더구나 이 태풍이 지난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어느 숲이든 일단 가 보기로 했다.
아침에 채비를 하면서 이미 가보았던 휴양림 숲길을 생각하다가 아직 가보지 않은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일정을 잡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서쪽 산간지대에 있어 함덕에서는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린다. 아직은 제주의 도로에 익숙하지 않아 가까운 곳의 숲과 오름만 다니다 보니 1시간의 운전이 부담스럽기는 했다.
제주도 북쪽에서 한라산 동쪽의 등줄기를 넘었다. 출발할 때는 구름이 낮았는데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중산간지대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가했다. 서귀포 앞바다는 맑게 보이지 않았지만 햇빛은 좋았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고 쌀쌀함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숲속을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듯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제주도 동쪽 중산간지대의 절물자연휴양림, 교래자연휴양림, 붉은오름자연휴양림과는 숲의 성격이 다르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인공조림된 삼나무 숲이 인상적이고 교래자연휴양림은 덤불과 활엽수가 엉클어진 야생의 곶자왈 특징이 강하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은 방문자 편의공간이 매우 넓을 뿐 아니라 우아하게 자란 곰솔 숲과 인공조림 삼나무 숲 그리고 활엽수 숲을 다 갖추고 있어 잘 계획된 공원의 느낌이 강하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한라산 남서쪽 해발 800 미터 지대에 있다. 숲엔 활엽수가 울창하며 덩굴은 상대적으로 적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간혹 보이고 어린 주목과 비자나무가 곳곳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숲의 경사면이 비교적 가파르다보니 주차장과 기타 편의시설을 위한 면적은 다른 자연휴양림들과 비교해 넓지는 않으나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다양한 숲길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휴양림 안쪽으로 차를 운전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용료를 지불하고 서귀포 방향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일방통행인 이 도로를 천천히 통과하며 숲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통행 차량이 많지 않으니 숲속 산책로가 불편하다면 이 길로 걸어도 불편함 없다. 휠체어나 유모차도 다닐 수 있는 어울림숲길은 약 2.2 킬로미터 정도의 건강산책로와 생태관찰로로 구성되어 있다.
숲속 산책로는 전 구간 야자매트가 깔려 있고 때로 자동차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나란히 이어지기도 하니 숲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하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도중에 법정악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왕복 1.2킬로미터 거리인데 이곳 전망대에서는 앞쪽으로는 제주도 남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눈을 돌려 숲을 보면 한라산 남쪽 경사면의 웅장한 숲이 보이고 그 끝에 백록담을 품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다. 법정악전망대 왕복까지 포함해 최대한 길게 선택해도 산책로는 6 킬로미터 정도이며 경사가 급격하게 가파를 곳도 없어서 크게 힘든 구간도 없다. 도로 중간에 차 세우고 큰 소리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몇 시간은 세상일 다 잊고 이 호젓한 숲길을 만끽할 수 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의 숲길은 비록 흙이 많은 길이고 산책길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야자매트가 깔려 있지만 도시의 매끈한 길에 길들여진 도시사람에게는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지면 때문에 서너 시간 걷고 나면 발과 발목에 많은 피로를 느낀다. 도시에서처럼 빨리 걸을 필요는 없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야 나무와 풀이 보이고 숲이 보인다. 그래야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소리가 들린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