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2019년은 배우 이정은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시작으로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등 올해 나온 화제작 속엔 늘 그가 있었다. 참여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정은은 화제작 속에서 화제가 될만한 연기를 선보였다.
여러 작품에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던 이정은은 지난달 막 내린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정숙 역을 맡아 특유의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정숙은 오래전 버린 딸 동백(공효진)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다. 치매에 걸렸나 싶었는데 연기였고, ‘까불이’인 듯 보였으나 실은 딸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지닌 어머니였다. 이처럼 이정은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한 인물이 가진 여러 면을 펼쳐 보였다. “아직 드라마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작품과 역할에서 빠져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네요.” ‘동백꽃 필 무렵’ 종영 후 학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의 말이다.
여러모로 잊지 못할 작품이지만, 출연이 단번에 정해진 것은 아니다. 처음 인물의 정보만 받고는 작품을 고사했다. 드라마 ‘아는 와이프’에서 치매에 걸린 인물을 연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이정은의 마음을 돌린 것은 ‘동백꽃 필 무렵’을 연출한 차영훈 PD다.
“처음엔 정숙이 치매를 앓는 인물이라는 정보만 받았어요. 이전에 연기한 역할과 비슷할 것 같아서 고사했죠. 그런데 차 PD님께서 ‘이야기가 풀리며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셨어요. 임상춘 작가님과 ‘쌈, 마이웨이’를 함께 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되리란 확신이 들어 승낙하고 대본을 받았어요. 정숙의 이야기를 사전에 듣지 않고 촬영을 진행했는데, 회를 거듭하고 대본을 받을 때마다 양파를 까는 듯한 재미가 있었어요. 연기자들도 모두 추리하는 마음으로 대본을 읽었죠.”
‘동백꽃 필 무렵’이 자체 최고 시청률을 새로 쓰며 막을 내린 날, 이정은은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기생충’으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탁월한 작품 선택에 관한 비결을 묻자 이정은은 “그동안 일해 온 시간이 축적된 덕분”이라고 답했다.
“제가 선구안이 좋은 게 아니에요. 오래 알고 지낸 팀에서 저를 지켜보고 불러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선구안은 그분들이 좋은 거죠. 함께 일하는 연기자 후배들에게 한 작품 한 작품 성실히 임하라고 조언해요. 인연이 어떻게 닿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6년 전 함께 했던 작업을 기억하고 저를 다시 부르는 일도 있어요. 이런 것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 작품 소중하게 대하는 자세는 중요하죠.”
이번 드라마에서 스릴러부터 휴먼드라마까지 소화했던 이정은은 “배우가 새로운 모습을 꺼내 보이기 위해선 다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생충’ 작업 당시 느꼈다”고 말했다. 스스로 보는 모는 모습과 타인이 볼 수 있는 또 다른 층위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아는 나만 내가 아니다. 나의 여러 모습을 여러모로 활용하는 분들이 많아지셨으면 한다”며 앞으로 더 다양한 역할과 연기로 대중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내 마음이 열려 있으면 어떤 역할이든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해요. 배우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열려 있어야 하죠. 그래야 여러 다른 모습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멜로에 도전하고 싶지 않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데, 저는 조금 다른 형태의 멜로가 좋아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멜로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같은 작품이에요. 꼭 남자가 아니라 동물이나 AI 같은 존재도 멜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 서로를 구원하는 것,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 / 사진=박효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