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부산의 한 극장. 영화 ‘히트맨’의 최원섭 감독과 배우들이 극장 화물 승강기 안에 몸을 실었다. 영화 개봉을 기념해 무대인사를 가던 참이었다. 전날부터 이어진 일정에 모두가 피로에 절어 있던 그때. 최 감독의 ‘마음의 소리’가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연극배우 톤으로) 다들 정말 깜짝 놀라겠군.” 영화의 재미에 관객들이 놀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함께 승강기를 탄 일행의 어깨가 일제히 ‘움찔’했다. “다들 ‘뭐야? 말풍선 속 대사가 왜 들려?’라는 마음이었어요.”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이경이, 거의 흐느끼듯 웃어가며 들려준 얘기다.
이이경은 “‘히트맨’으로 좋은 가족을 얻은 건 확실하다”고 했다. 자신보다 17년 선배인 배우 정준호를 두곤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진다”며 미소 지었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자신이 찍은 정준호의 동영상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느라 바빴다. ‘히트맨’ 촬영 당시 이이경이 정준호의 무릎에 안겨 인사를 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권)상우 선배님에게도 똑같이 했는데, 모두 귀여워 해주셨어요. 나중엔 무릎 위에 안 올라가면 ‘얘가 무슨 일 있나?’ 하셔서 관성적으로 했습니다. 하하하.” ‘현장에서 일한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 감독은 JTBC 드라마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이이경을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제작진을 설득해 섭외 명단에도 없던 자신을 불러준 최 감독에게 이이경은 깊은 고마움을 느껴 출연을 결정했다. 하지만 정작 대본을 받아들자 숙제가 생겼다. 이이경은 “영화 ‘공조’의 막내 형사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자신이 맡은 철에게서 별다른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는 “철이 마지막 하극상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 같았다”며 “하극상 전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잘 쌓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제 대사는) 거의 다 애드리브라고 보시면 돼요. 원래 대본에는 제 대사가 굉장히 깔끔한 문어체로 쓰였거든요. 좀 심심하게 느껴졌어요. 캐릭터에 개성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촬영 전부터 감독님을 서너 번 찾아가 상의했죠. 감독님, 선배님들도 잘 받아주셨고요. 사실 ‘공조’의 김성훈 감독님이 ‘너 촬영 때 뭔가 하고 싶어 하는 거 느꼈어. 근데 안 하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경험들이 다 (지금을 만드는 데) 바탕이 된 거죠.”
상상력을 이기는 게 경험의 힘이라고 했던가. 돌아보면 이이경의 10~20대는 ‘연기 밑거름’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18세 때 독립한 그는 옥탑방, 반지하, 원룸텔을 비롯한 각종 ‘텔’들, 선배 배우의 집을 전전하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지금의 자리에 왔다. 생활은 고달팠지만, ‘네가 고생한 경험이 연기할 때 네 자산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첫 작품 출연료로 80만원을 받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게 불과 6년 전. 코미디와 정극을 오가며 착실히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덕에, 지금은 “점점 일반적이지 않게 되는 저 자신”을 걱정할 정도다.
이이경이 한때 서울 망원동의 ‘크리에이터 클럽’ 모임에 나간 것도 이런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이경은 소방관, 간호사, 떡볶이 가게 사장, 취업준비생, 대학생 등과 2주에 한 번 만나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했다. 때론 특유의 발랄함으로 조원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마지막 모임 때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는데, 모두들 너무 부정적인 거예요. 이런 얘기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닌데…. 그래서 말했죠. ‘다들 너무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바늘구멍만 한 행복이라도 찾아서 넓혀가야지, (앙칼진 목소리로) 솔직히 다들 실망이에요!’” 이 발언 덕분에 그는 조원들로부터 ‘오늘의 영감(靈感)님’으로 뽑혔다. 이날 하루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사람이란 의미다.
데뷔 9년 차, 출연작은 50여 개. 배우 김선아가 ‘나보다 작품을 더 많이 했다’며 놀랐을 만큼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연기력 시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이경은 “내 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에 취해 매너리즘에 빠질 것을 늘 경계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 ‘열정 부자’ 청년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래서 물었다. ‘이 사람만큼은 내 연기력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느냐고. 그러자 유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개인적인 얘긴데…. 제 친구 중에 ‘이규태’라는 애가 있어요. 16년 친군데, 맨날 저더러 연기를 못한대요. 정작 제 작품은 보는 것 같지도 않은데! 꼭 적어주세요. 이규태라고, 철산역 앞에서 핸드폰 팔아요. 걔는 나중에 나이 여든 먹어서도 ‘(할아버지 목소리로) 연기력 언제 늘 거야. 연기 언제 할 거냐고!’ 할 거예요. (일동 폭소) 전, 비슷한 배역은 있을지언정 똑같게 보이진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해요. 제 배역을 두고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연기하고 싶어요. ”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