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다. 눈치 빠르고 귀 밝은 관객들은 느끼겠지만, 2020년 설 연휴에 상영되는 영화 라인업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4일 연휴 기간 동안 두세 번 극장을 찾을 영화광이 아니라면 기회는 한 번. 그 중에서도 취향이 맞지 않으면 지뢰를 밟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연휴 직전인 23일 기준 예매율 상위권에 포진한 영화 여섯 편이 관객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각 영화의 입장에서 선택 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봤다.
△ ‘남산의 부장들’
이것은 역사 영화인가, 스릴러 영화인가. 두 가지의 장점을 모두 갖춘 영화가 ‘남산의 부장들’이다. 대통령 암살 사건이라는 초유의 실화 소재가 가진 힘이다. 10·26 사건을 잘 모르는 관객도 장르적인 재미를 누릴 수 있다. 1979년을 살았던 관객이라면 그 당시의 기억을 재조합할 수 있다. 알고 있던 사실과 모르고 있던 사실이 교차한다. 멀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인물들의 심리를 헤아려보는 재미도 있다.
화려한 배우들의 명연기도 커다란 장점이다. 이병헌과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이 출연한 작품을 보고 후회한 경험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병헌도 이병헌이지만, 박 대통령 역을 맡은 이성민의 놀라운 연기는 꼭 봐야 한다. 설 연휴가 지나고 지인들에게 ‘남산의 부장들’을 봤다고 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가능성이 높다. 괜히 개봉 첫 날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한 게 아니다.
△ ‘히트맨’
누가 명절 연휴에 심각한 영화를 보나. 온 가족과 함께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가 제격 아닐까. ‘히트맨’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코미디에 집중한다. 배우들부터 명절 코미디에 특화된 장인들로 구성됐다. 어르신들에게 익숙한 권상우와 정준호와 최근 코미디 연기로 가장 주목받는 배우인 이이경이 합류했다. 이야기가 늘어져도 배우들이 연기로 살려낸다.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도 장점이다. 감독이 일부러 액션과 코미디에 능숙한 권상우를 캐스팅했을 정도다. 또 웹툰과 애니메이션, 실사를 오가는 속도감 있는 영상도 눈에 띈다. 명절에 ‘히트맨’만큼 안정적이고 확실한 선택은 없다.
△ ‘미스터 주: 사라진 VIP’
누가 명절에 가족들과 액션 영화를 보나. 다 큰 아저씨들이 싸우면 어린 아이들이 울면서 보채기 십상이다. ‘미스터 주: 사라진 VIP’의 가장 큰 장점은 동물이다. 단순히 한두 마리 동물이 등장한다거나, 사람이 인형 탈을 쓰고 연기하는 수준이 아니다. 판다, 앵무새, 흑염소, 고릴라 등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동물들이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한다. 또 군견 알리가 주연급으로 활약하며 실제 명연기를 선보인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배우 이성민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자막이 적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다양한 동물들의 목소리를 유명 배우들이 연기해 각자의 개성을 살린다. 명절 분위기를 결정짓는 건 아이들이다. 그들의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 ‘해치지않아’
뻔하고 타율 낮은 코미디에 지친 자들이여 오라. ‘해치지않아’는 가장 안전하고 트렌디한 코미디 영화다. 지난해 히트작 ‘극한직업’처럼 힘 빠지고 어이없지만 웃기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최근 떠오르는 배우 안재홍이 특유의 호흡으로 코미디의 맛을 살렸다.
동물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는 동물원을 주제로 하지만 동물들의 입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어느 가족이 봐도 싸울 일이 없는 영화다. 정치적이지도 않고 불편함도 없으면서 완성도는 높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다투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 ‘스파이 지니어스’
명절에 꼭 한국영화를 봐야한다는 국가적인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명절이 아니었으면 1위를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영화가 ‘스파이 지니어스’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영상미는 기본. ‘스파이 지니어스’는 히어로 주인공을 뻔하지 않은 방향으로 다루는 트렌디한 이야기가 장점이다. 다음 장면을 쉽게 예측할 수 없고, 쉽게 빠져든다.
두 명의 괴짜가 다를 뿐 틀리지 않다는 올바른 교훈은 아이들에게도 유익하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이 봐도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영화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윌 스미스와 톰 홀랜드가 괜히 목소리 연기를 맡은 게 아니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현재 트위터에선 ‘불초상’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예술영화’, ‘프랑스영화’에 대한 편견을 깨기 가장 좋은 영화다. 간단한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대신, 영화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다루는 데 온힘을 쏟는다. 음악과 미술을 다루는 방식도 훌륭하다. 감독은 카메라로 고전 회화를 그려낸다. 마치 미술관에 온 것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명절을 떠나서 당신의 2020년을 대표할 영화 중 하나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영화 ‘기생충’에 밀려 미국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두 여성의 사랑을 다룬 퀴어 영화인만큼 가족들과 함께 보기에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라는 법이 있나. 많지 않은 상영관에 적당한 시간대를 찾아갈 여유는 명절이 주는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