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생활 9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낯설었던 풍경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던 생활풍습,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대해서도 ‘불편함’보다는 ‘다름’으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많이 익숙해졌다. 제주생활에서 즐겁고 유쾌한 기억만 쌓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쓰레기다. 유명 관광지, 중산간지역의 마을과 밭과 숲길, 바닷가, 오름 등 간 곳마다 쓰레기가 넘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바닷가와 오름에 가보면 단번에 관광객이 버린 것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쓰레기가 참 많다. 이러한 쓰레기는 버려야 할 곳에 버리지 않은 관광객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관광객 입장에서 보면 버릴 곳이 없다. 관광지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든 지자체든 쓰레기통을 충분히 설치하고 늘 깨끗이 치워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관광객들이 버리는 쓰레기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주민들이 버리는 쓰레기다. 귤 농원이든 밭이든 마을이든 구석구석 많은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곳곳에 폐기물분리수거장이 있지만 도심에서 벗어나면 무용지물이다. 바닷가에서 태우고, 밭 가장자리에서 태우고 집 마당 울타리 아래서 태운다. 걷다보면 플라스틱과 비닐 타는 냄새는 어느새 일상이 된다.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듯 때때로 새로 경험한 일들을 알려왔다. 초등학교 내내 외국인이 수업하는 영어 교실에 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아이를 영어 학원 하나 보내기에도 벅차기도 했지만 길게 보면 초등학교 시절만큼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시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른 학원은 일체 보내지 않았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아이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그 앞날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야 했다. 모두들 퇴직을 걱정하고 있는 나이가 되고 보니 재취업은 생각할 수 없었다. 12년간의 병원 직원 경력으로 45살의 나이에 어디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실직 후 두 달 동안 작은 방 월세 낼 돈도 벌지 못하고 있으니 날은 덥고 일상은 암울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반도체 관련 기술 매뉴얼 번역을 해 본 적이 있어 옛 연락처를 찾아 다시 일을 시작한 이후 바람이 서늘해지며 소일거리 정도의 일이지만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아직 내 생계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머니 아버지를 모셔왔다. 아이들이 미국으로 떠나고 석 달도 되지 않아 세 번째 이사를 했다. 이번엔 방이 두 개인 작은 저층 아파트였다. 뇌졸중에서 회복되지 않아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어머니 수발은 아버지 몫이었지만 내가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수입은 여전히 셋이 생활할 만큼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58년 개띠 세대는 부모님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첫 세대라는 생각을 하고 보니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한 시간, 하루가 편안했다. 함께 식탁에 마주 앉으면 더 이상 흐뭇할 수가 없었다. 내 손으로 마련한 음식을 늘 복스럽게 드셨다.
한동안 바닷가로 이어지던 길이 제주도 서쪽으로 진입하기 전 다시 중산간지대를 행했다. 그 길을 따라 제주영어교육도시가 기대고 있는 곶자왈을 더듬었다. 그리고 길은 다시 서쪽 바닷가로 향하고 있었다. 산방산 근처를 지나고부터는 부쩍 평야가 넓어졌다.
짙은 숲속에서는 그 환경에 순응해 은밀하게 생명을 잇거나, 한줄기 빛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무와 덩굴과 풀과 이끼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찾으며 눈길을 멀리 두지 못한다. 늘 발밑의 돌부리를 확인해야 하고 돌 틈과 나뭇잎 사이에서 문득 보이는 낯선 꽃과 풀이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마늘밭과 양파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보리밭을 지나기도 했다. 조금씩 다른 초록을 보며 걷는 발걸음이 한결 편안했다. 멀리 있는 오름을 보며 걸어가야 할 곳을 짐작할 수 있으니 걷기가 한결 한가롭다. 지평선이 보이고 때로는 그 너머의 수평선까지 보이는 넓은 들 가운데 서서 우리네 삶도 늘 이렇게 멀리까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들에서는 사실 살펴볼 것이 거의 없다. 마늘이 참 실하게 커가는구나, 밭담 아래의 광대나물꽃은 여전히 앙증맞구나, 양지바른 길가에 무리지어 핀 봄까치꽃은 모여 있으니 더 예쁘구나, 벌써 보리이삭이 패기 시작하는구나... 부지런히 걸어 바닷가의 수월봉에 올랐다.
수월봉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차귀도가 보인다. 그 바다 한가운데 어디쯤 수월봉을 남긴 화산 분화구가 있다. 그 분화구에서 화산이 폭발하며 커다란 오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바닷물과 함께 섞여 분출되면서 차곡차곡 쌓였던 화산쇄설물은 바닷물에 깎여나갔다. 바닷가에 꽤나 큰 오름을 만들었지만 가끔 몰아치는 태풍과 찰싹거리는 잔파도에 다 사라지고 1만8천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자리만 남았다. 수월봉 아래의 지질공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수월봉을 내려와 해안으로 들어서면 엉알길이 나타난다. 엉알은 제주말로 큰 바위 아래 또는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인데 당산봉 아래의 차귀도포구까지 1.2 km 정도 이어진다. 엉알길 입구에서 왼쪽 해안으로 내려가면 약 70m 높이의 거대한 지층벽을 볼 수 있다. 이곳 화산폭발 당시 뿜어져 나온 화산재와 화산탄 등이 켜켜이 쌓인 단면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다시 올라와 엉알길을 따라 당산봉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 왼쪽 바다에 떠 있는 차귀도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오른쪽엔 온갖 기묘한 형상의 화산 단층이 새롭게 나타난다. 이곳은 물이 귀했던 시절 제주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땅 속으로 스며든 물이 약한 지층을 따라 흐르다 이곳 단층 곳곳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병든 어미를 위해 약초를 캐다 떨어져 목숨을 잃은 녹고의 눈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라는 샘은 특히 다른 곳보다 귀중히 여겨지기도 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 걸어가면서 문득 오른쪽 벽을 보면 곳곳에서 다른 모양의 지층 단면이 나타난다. 나무와 덩굴에 덮여 보이지 않는 곳도 있고 비바람에 깎여 섞여 있던 돌들이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곳도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층 단면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선지 절벽의 나무와 풀을 제거하고 있었다. 나무와 풀이 제거된 곳의 흙도 깨끗이 쓸어내고 보니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지층 단면이 드러나고 있었다. 저렇게 드러나면 비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훼손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화산지층의 단면과 세월이 만든 저 유려한 곡선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백년, 천년 후에 이곳에 올 후손들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쿠키뉴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