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은 언제 어디서 찾아오든 보람을 안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불교 신자들은 천년고찰 선운사가 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고, 많지는 않겠지만 서예에 관심이 있다면 일주문에서 일중 김충현을 만나고, 부도밭에서 추사 김정희를, 천왕문에서 원교 이광사를 만나는 기쁨이 더해진다.
3월 하순이면 선운사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의 울창한 동백숲에 붉게 핀 동백꽃이 수줍게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4월 하순이면 화들짝 피어난 겹벚꽃이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벚꽃이 지면 새로 핀 나뭇잎이 아직 검푸른 소나무와 동백 숲 너머로 꽃보다 더 아름답다. 여름 볕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선운사 마당과 대웅전 양쪽의 배롱나무가 붉게 타오른다.
9월 하순이 시작되면 눈 가는 곳 어디든 검붉은 꽃무릇이 꽃대를 올리고 타오르기 시작한다. 깊어진 가을에 선운산의 화려한 단풍은 나무에서 불타고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의 물속에서도 불탄다.
봄부터 가을까지 붉게 물들었던 선운산은 겨울이 되면 추위 속에서도 동백과 소나무는 그 초록이 더욱 짙어진다. 눈이라도 내리면 그 초록으로 온 산봉우리들이 더욱 희게 빛난다.
그러니 선운산에 한 번만 와 볼 수는 없다. 동백꽃 필 때 오고 배롱나무꽃 필 때 오고 꽃무릇 타오를 때 오고 도솔천에 단풍 빛 곱게 비칠 때 와야 하고 한겨울 눈 쌓일 때는 푸른 옷 입은 산봉우리들 그리워 온다.
어떤 이유로든 선운산에 오면 주차장에 발을 딛는 순간 늘 두 가지 이유로 감탄한다. 주차장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은 그 하나하나가 평범하지 않다.
그렇다고 시작부터 마음이 앞서 서두르면 선운산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되고 돌아가서 후회하며 다시 갈 궁리를 하게 마련이다.
선운산의 매력은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산봉우리가 에워싼 하늘을 한 번 보고 앞을 보면 소금전시관, 취운 진학종 초서 전시관 그리고 기념사진 찍기에 적당한 크고 작은 장치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붙든다.
주차장 왼쪽으로 선운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울이 도솔천이다. 그 냇가 바위벽을 사철 푸르게 감싸고 자라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그 씩씩한 생명력이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천연기념물 제367호 ‘고창 삼인리 송악’인데 현재 내륙에서는 고창이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송악은 나무,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 숲 등 어디에서든 지천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고창에서는 흔하지 않다.
선운사 일주문에 이르기 전까지 생태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습지 형태의 연못과 숲에 다양한 나무와 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연못엔 멸종위기 종인 가시연꽃이 조심스럽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고 발자국 소리에 물고기들이 모여들어 펄떡인다. 숲엔 특이하게도 오래된 감나무가 많이 보인다. 아마도 이 일대가 주차장과 기타 부대시설로 바뀌기 전까지 있었던 마을의 감나무를 옮겨 심은 듯하다.
풀과 나무에 조금 관심이 있다면 생태숲을 살피기에도 한나절은 필요하다. 특히 9월 하순 꽃무릇이 마른 짚에 불 번지듯 타오를 때면 나무와 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그 붉음에 정신을 빼앗겨 한 걸음 나아가기 어렵다. 그러니 굳이 서둘러 일주문 안의 선운사 골짜기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천천히 걷다가 숲 가장자리에서 미당 서정주 시비를 만나면 거기에 적힌 ‘선운사 동구’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읽어도 좋다. 이렇게 차분히 시 한 수 읽은 적이 언제였던가.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