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의 계단식 논 한가운데, 논둑에, 또는 밭에도 고인돌이 있었다. 담장의 한 부분이기도 했고 때론 마당으로 튀어나와 아이들이 올라타는 놀이터였다. 어느 고인돌 아래서는 아낙들이 정화수 한 그릇 떠 올리고 촛불 밝히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양을 보고 거북바위, 두꺼비바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때로는 바위의 무게감에 압도되어 칠성바위, 장군바위라 불렀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약 3,000년 전부터 1,000여년 동안의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고인돌이 그 시대의 무덤으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여년 전부터다. 고창에서는 1965년 국립박물관이 현재의 고인돌공원 서쪽 (왼쪽) 끝의 고인돌 3기를 발굴조사한 이후 현재까지 약 1700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인돌박물관이 있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일대 야산 1.8km 범위 안에는 해발 15~65m의 등고선을 따라 약 450기의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다. 또한, 고인돌의 형식이 다양하고 덮개돌 채석장까지 확인되면서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군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고인돌 유적지를 정비하고 고인돌박물관, 선사마을, 재현공간, 체험실습장, 탐방로 등으로 이루어진 고창고인돌공원을 조성했다. 고인돌공원 탐방은 고인돌박물관에서부터 시작한다.
고인돌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고인돌을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대형 덮개돌 제작과 운반과정, 고인돌이 제작되던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은 물론 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도 소개한다. 고창, 화순 그리고 강화 고인돌 유적의 특징을 비교하고 우리나라 고인돌의 분포, 고인돌 변천 과정 등도 살펴볼 수 있다.
고인돌박물관에서 고인돌유적지까지는 약 0.8km이고 고인돌유적지의 좌우 거리가 약 1.7km이니 걸어서 고인돌을 모두 살피려면 최소 5km를 걸어야 한다.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탐방 차량을 이용하면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5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고창고인돌유적지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없다. 논과 밭 가운데 묵직하게 자리 잡은 바위를 피해 모내기를 하고 밭 이랑을 내던 사람들이 떠나자 그 바위들이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만 희미해진 논둑과 밭둑의 흔적과 함께 이제는 고목이 되어가는 감나무를 보며 ‘여기 사람들이 살았었거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소 2,000년 전에 살았던 이곳의 원주인이 여러 형식의 고인돌로 되돌아 왔다.
고창고인돌유적지엔 고인돌이 세계 최대규모로 밀집되어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지상석곽식 등 지금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형식의 고인돌이 다 있다. 고인돌의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하다. 고인돌유적지 왼쪽의 산엔 덮개돌 채석장 흔적까지 있으니 고인돌에 관한 산 교육장이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