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개화(開花)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개화(開花)

이정화(주부/작가)

기사승인 2020-11-09 11:05:28
▲이정화 작가
올해는 강릉 오죽헌의 검은 대나무를 비롯해 전국 곳곳 대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한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들어 ‘신비의 꽃’으로 불리는 그 꽃을 반기며, 누군가는 기쁜 일이 생길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나무는 꽃을 피운 뒤엔 죽어버리니 그것을 흉조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꽃 핀 대나무가 죽는 이유는 과학적으론 그만큼 이미 수령이 오래돼서라고 하지만, 나무가 곧 죽을 걸 알고 바라보는 꽃구경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나무의 개화 소식에 부럽기만 했다. 대나무꽃은 60년에서 100년에나 한 번 핀다니 그 중 어떤 나무는 나와 동갑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언젠가 그처럼 꽃을 한 번이라도 피워봤을까, 돌이켜보게 되었다. 게다가 늙어갈수록 쇠약하고 초라해지는 사람과 달리, 죽기 전에 꽃을 피우는 대나무의 일생은 정말로 빛나고 아름다운 마무리로 여겨졌다. 

나의 어머니는 96세다. 평생 주변의 존경을 받고, 적어도 우리 가족 중에선 최고의 인성과 지혜를 가진 분으로 사랑을 받던 어머니는 십여 년 전 치매에 걸리셨다. 나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어머니의 치매는 나에게도 절망이었다. 혼란에 빠진 엄마를 보는 것이 안타깝고 두려워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엄마를 다시 깨워보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있는 듯한 엄마의 정신세계를 붙잡아보려고, 한동안 매 순간 엄마에게 시비를 걸어 따지고 흔들었다.

늪에 빠진 듯 엄마와 함께 허우적대던 어느 날, ‘치매는 정신적 죽음’이란 말을 들었다. 막연히 치매가 죽음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해왔지만, 막상 ‘엄마’와 ‘죽음’이란 말을 같이 생각하는 것은 화가 나도록 슬펐다. 나는 그 뒤부터, 지혜로운 우리 엄마는 단지 마음을 비운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평생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수고했던 엄마니까,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영혼부터 먼저 쉬시는 거라고….  

▲대나무꽃. 이정화 작. 

내가 엄마를 받아들인 게 먼저인지, 엄마가 그런 게 먼저인진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엄마는 식물 같아지셨다. 나무같이 순하고 화분같이 조용하게 세월을 보내신다. 종일 햇빛과 바람만 들락 날락거리는 방안에서 우두커니 계셔도 그렇게 평화로워진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얼크러진 기억을 바로잡는답시고 엄마를 더 혼란스럽게 했던 건 내가 아니었나, 거듭 가슴을 친다.

고령의 대나무가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문득 우리 어머니가 대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속은 막막하게 빈 듯이 보이나 몸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주신 것도, 휘어질 대로 휘어졌지만 부러지지 않은 것도….

치매에 걸린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반기시고, 우리를 바라보며 웃으시고 먹을 것을 권하신다. 때때로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실 때도 결코 누구를 내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꾸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다. 얼굴은 가끔 잊을망정 자식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배려는 놓지 않았으니 그토록 오래 치매를 앓는 환자 중에선 단연코 최고일 어머니는 대나무에 핀 꽃만큼 매일 매일이 우리에게 기적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개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젊음이 가면 흔히들 꽃다운 푸른 시절이 다 갔다고들 하지만, 누구는 이십 대에 꽃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누구는 중년에 나무처럼 빛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반짝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뒤늦게 훨훨 날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은 똑같이 한 생을 살아도 다년생 식물처럼 여러 번 살아가면서 다시 꽃을 피우거나 빛나기도 한다. 늙고 병든 노인의 모습에서, 한때는 꽃이었고 한때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그들의 젊은 모습을 떠올리긴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울울창창 우람한 소나무처럼 살다가 가녀린 대나무로 나이 들어도 또 다른 꽃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제도 어제도 꽃 같던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오늘도 꽃 같다. 참으로 좋다. 점점 나이 들고 있지만 아직 남은 날이 많은 우리에게도 참 다행한 일이다. 살다 보면 꽃은 언제고 또 다르게 다시 피울 수 있다.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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