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속 순천댁(이정은)은 흔히 보던 캐릭터가 아니다. 평범한 마을주민으로서의 드라마와 뭔가 숨기고 있는 미스터리 중간쯤에 위치해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결말에서야 드러나지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알 수 있는 점도 있다. 배우 이정은이 아니면 누가 연기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 그를 믿고 끝까지 지켜보면 된다는 것.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정은은 “느린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내가 죽던 날’의 출연 계기를 밝혔다. 과거 어느 외국인에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같은 영화를 한국 관객이 얼마나 볼지 질문 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호흡이 느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출연을 결정한 이후엔 순천댁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순천댁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목격자잖아요. 사실 감독님에겐 조금 더 스릴 있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얘기하기도 했어요. 언뜻 영화가 형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휴먼드라마잖아요. 극단적인 면을 덜어내고 감정이 흐르는 타이밍을 보는 식으로 전개돼요. 제가 등장하는 앞 부분에선 좀 잔재미를 주면서 모호하게 만드는 연기가 있었어요.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해야 흥미를 유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순천댁 역할을 잘 풀었다는 생각보다는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손바닥의 굳은살과 세월로 감당한 얼굴의 표현을 많이 못해서 아쉬웠어요. 진중하게 이미지로 보여주는 사람이 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요. 해안가에 어머니들의 피부에서 오는 그 느낌 있잖아요. 영화를 보면서 분장을 더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정은이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배우 김혜수의 존재였다. 이미 ‘내가 죽던 날’의 대본이 만들어질 때 같은 사무실에서 그 과정을 모두 보고 있었다. 김혜수가 출연을 결심하자, 이정은도 “과감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혜수 씨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영화 ‘국가부도의 날’도 정말 좋게 봤죠. 배우의 얼굴이 계속 좋아지는 걸 보고 있어요. 그건 배우로서 삶의 겹이 적당한 파도에서 널을 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촬영하는 첫날 혜수 씨가 찍어놓은 걸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화장기 없는 매력이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지금도 같이 연기한 장면들이 생각나요. 혜수 씨를 만난 건지 그 역할을 만난 건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 파장이 있더라고요. 현실 같은 담백한 느낌이 좋았어요. 배우들은 스태프도 사라지고 둘이 그 낯선 소음 속에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제일 좋은 상태인 것 같아요.”
외딴 섬의 마을 주민 역할인 덕분에 이정은의 촬영 대부분은 섬에서 진행됐다. ‘내가 죽던 날’을 찍으며 KBS2 ‘동백꽃 필 무렵’과 영화 ‘자산어보’도 같이 촬영 중인 바쁜 날들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떠나 지내는 건 연기에 대한 집중력을 높였다. 영화 ‘기생충’ 이후 얻은 ‘대배우’라는 타이틀에는 손을 내저었다.
“전 주말드라마 찍을 때 시달렸어요. 평범한 역을 잘못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연기 못한다고 해도 ‘못하니까 하는 거지’, ‘더 잘하려고 하는 거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얘기를 듣고 포기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저에 향한 악플에 대해 내가 어떤 관성을 갖고 갈 것인지도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요. 제가 정신력이 좋아서 충격은 오지만 완화할 방법을 아는 것 같거든요. 연기는 계속 할 거예요. 물론 계속 잘하는 연기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엎어지겠지만 그걸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응원이 필요해요.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잘될 때만 말고 안 될 때도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술 먹고 놀고 열심히 안한다면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면 좀 응원해주고 사랑해줬으면 하는데, 욕심일까요?”
이정은은 술자리에서 술만 먹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이 갈 때가 있다고 했다. 그가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이미 커다란 감정 속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지켜보는 시간이 관계에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처럼 관객들이 평소에 잘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내가 죽던 날’을 통해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객들이 ‘내가 죽던 날’을 어떻게 볼지 생각해요. 여성들만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뚜껑을 열어봐야 알잖아요. 40대 아저씨가 극장에 앉아서 울지도 모르니까요. 배우가 연기하는 감정이 정말 진실하다면 다른 층위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봤던 범죄 장르로 얘기를 따라가면 이해가 잘 안될 거예요. 범인이나 시체는 영화에 나오지 않거든요. 수사를 하는 사람의 상태가 중요하죠. 영화의 후반작업을 보면서 감독님에게 중간 중간 관객들이 못 느끼던 감정이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또 김혜수라는 배우의 측면을 보는 걸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연기한 역할도 이정은 배우가 연기하면 어떨지 애정을 갖고 보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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