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너를 기억해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너를 기억해

이정화 (주부 / 작가)

기사승인 2021-01-18 11:32:04
▲이정화 작가
오래전, 한 여행가는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다 카페에서 책 한 권을 훔쳤다. 한 일본인이 여행 중에 읽고 다른 여행자를 위해 카페에 남긴 책이었다. 마침 일본어를 읽을 수 있었던 여행가는 어차피 그건 카페 책이 아니라 남이 두고 간 거니 누가 가져다 읽어도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다른 도시의 숙소에서 여행가가 그 책을 읽고 있을 때, 한 일본인이 말을 걸었다. 일본어책을 읽고 있으니 그가 한국인인 걸 몰랐던 것이다. 외국에서 만난 이웃나라 사람끼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지난 여정을 얘기하다 헤어진 뒤, 그 여행가는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일본인 이름이 바로 그 책의 기증자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넓고도 좁은 세상의 우연에 여행가는 앞으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의 옛 친구를 떠올린 것은 며칠 전 이 여행가의 글을 읽은 뒤였다.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던 친구의 이름이 깊은 물속에 떠오른 부표처럼 솟아올랐다. 42년 만이었다. 고3 때 같은 반이었으나 그리 친하진 않았던 친구는 어쩐 일인지 학교에서 꽤 멀었던 우리 집에도 한 번쯤 놀러 왔던 것 같다. 친하든 아니든 함께 무얼 많이 같이하기엔 어렵던 메마른 고3의 겨울이 끝나고 대학생이 된 어느 여름, 친구가 우리 집에 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서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그날도 내게 먼저 연락을 하고 온 것도 아니라 나는 집에 없을 때였다. 그날 친구는 단 몇 십 분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나의 빈방에 잠시 들려 가족들에게 내가 빌려주기로 했다며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다 주신 미술전집을 모두 가지고 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뒤, 친구는 내게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나는 친구의 연락을 기다렸다. 만일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쩜 오랜만의 재회에 정말로 더 친해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조금은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책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그러나 내가 전화를 걸어도 다른 가족들을 통해 ‘외출 중’이라는 말만 전했던 친구는 끝내 아무 소식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그 애의 얼굴도 이름도 잊었으나 그 책은 오래오래 기억했다. 아버지의 소중한 선물이었고 구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했지만 그토록 그걸 갖고 싶어 한 친구를 생각하면 그 책이 점점 더 귀하고 아쉽게 느껴졌다. 나는 점점,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이미 이별을 했던 사이니 책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친구에게 그 책의 소장가치에 비하면 나의 의미란 정말로 하찮은 존재였을 것도 깨닫게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기억해낸 뒤, 나는 친구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마치 그 옛날 바닷가 모래밭에다 옛 사람 이름을 써보던 때처럼... 그림을 잘 그렸던 친구니 혹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흔하다곤 할 수 없는 친구이름과 화가를 함께 검색하자 놀랍게도 같은 이름의 화가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외국에 머물러 짧은 인터뷰와 작품사진뿐인 그 화가가 그 친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기사 속의 그림들이 꼭 친구 그림처럼 느껴졌다. 박자는 종종 놓쳤지만 유난히 풍부하고 낭랑한 음성을 가져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친구의 목소리, 변기가 깨져 다쳤다면서 어느 날 다리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던 그 애의 목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시킨 뒤 내게 털어놓던 사소한 비밀들... 우리는 애초에 친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없어진 책과 함께 친구를 잊으려고 일부러 잊어버렸던 걸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친구와의 시간들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돌아보면 우리는 한때 꽤 친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그 애의 얼굴과 이름을 잊고, 우리가 친구였다는 것까지를 잊었었다면 그 책까지도 잊어줬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를 버리고 책만 간직한 것은 그 애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옛 기억을 불러일으킨 그 그림들이 친구의 그림이길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도 꼭 화가가 되어있기를 원했다. 내게서 몰래 화집을 가져간 친구가 그 책을 보며 마침내 화가가 되었다면 그 책은 책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된 셈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그 친구도 나를 잊었겠지만 내 책이 화가의 애장품으로 남았다면 그것도 괜찮다. 책은 괜찮다. 나는 어딘가 있을 친구에게 가만히 말을 걸어보았다. 이제 나는 너를 기억해. 그저 너를 기억해.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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