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정은(유다인)은 조금씩 사회의 사각지대로 밀려난다. 처음엔 책상이 옮겨지고 그 다음엔 일을 빼앗긴다. 그리고 지방 하청업체로 발령이 나고, 그곳에서도 책상 하나 외에 할 일은 주어지지 않는다. 정은은 좌절하고 싸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 선택하는 인물이다. 배우 유다인은 정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하며 그가 왜 현장으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설득해낸다.
지난 20일 화상 인터뷰로 쿠키뉴스와 만난 유다인은 “사람이나 인물에 매료됐을 때 출연해야겠다고 크게 느낀다”고 털어놨다. 11년 전 그녀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한 영화 ‘혜화, 동’(감독 민용근)과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 출연한 계기는 같았다. 유다인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면서도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진심이 다 표현된 것 같아서 그 점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정은이 차갑게 나오잖아요. 영화를 보신 분들도 차갑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전 차갑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KTX 승무원 복직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는데 그 영향이 커서 그런지 절박함이 더 와 닿았어요. 그냥 시나리오만 봤다면 인물을 분석하듯이 했을 텐데 이번 작품은 좀 남달랐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준비 과정에서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하거나 방향성에 대해 의논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혼자 준비했던 게 큰 것 같아요.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게 다큐멘터리였고요.”
영화에서 정은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비춰진다. 유다인 역시 “타이트 장면과 클로즈업 장면이 많아서 최대한 절제하면서 표현하려고 했다”고 했다. 특별한 연기 스킬보다는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은이 되어 촬영에 임했다.
“정은이 안타까운 순간이 많았어요. ‘일을 줘야 일을 하죠’라는 대사가 특히 그랬고요. 정은의 성격이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일을 달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회사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밀쳐지는 후반 장면에서 정은의 마음이 많이 와 닿았던 기억이 나요.”
유다인은 영화를 찍은 시기를 전후해 배우로서 달라진 점이 많다고 했다. 과거엔 뭘하든 진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었다면, 지금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 출연하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배우로서 정은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관객들과 함께 이것에 대해 같이 공감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예전엔 제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시나리오에 출연했어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기점으로 제가 바뀐 것 같아요. 제가 잘 쓰일 수 있고 도움이 되는 작품에도 눈길이 가더라고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 ‘내가 이런 걸 갖고 있었구나’ 하고 몰랐던 부분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요즘엔 ‘이건 도움이 되겠다’,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나리오들에 더 마음이 가요.”
삶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과거엔 일을 우선시하면서 달려갔다면, 지금 유다인에겐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유다인은 “그들을 잘 챙기는 게 당장은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도 배우로서 힘을 빼고 갈 생각이다.
“당장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길게 보려고 해요. 그러려면 욕심 부리지 않고 힘을 빼고 가야겠죠. 요즘 배우 선생님들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굉장한 존경심이 들어요. 선생님들이 ‘그냥 힘 빼고 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세요. 그래서 저도 욕심 부리지 않고, 남들 곁눈질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제 호흡대로 가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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