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감동은 그대로다. 지난 1995년 초연 이후 25주년을 기념해 뮤지컬 ‘명성황후’가 다시 돌아왔다. 2년의 준비를 거치며 손 본 흔적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 말기 역사와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 전개는 여전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열리는 1896년 일본 히로시마 법정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일본 재판부는 범죄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며 무죄 판결을 내리고, 객석에선 일왕에 대한 충성 외침이 들려온다. 이야기는 30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어린 왕을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여흥 민씨 가문의 민자영과 혼인시킨다. 세자의 탄생 후 친정을 선포하고 권력을 쥔 고종은 왕비와 함께 급격한 개화정책을 펼치지만, 일본의 관리들은 왕비를 걸림돌로 여기기 시작한다.
25주년 기념 공연을 맞아 ‘명성황후’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이야기를 배우의 노래로만 전개하던 성 스루(Sung-Through) 형식에서 벗어나 대사를 추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곡의 분위기와 가사를 듣기 전, 대사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 무대 곳곳에 LED 패널을 이용해 공간의 분위기를 살렸다. 의상과 소품도 새로운 디자인으로 제작됐고, 스토리와 음악, 안무가 조금씩 변경되며 속도감을 높였다.
여러 배우들의 안무와 노래, 무대가 주는 에너지가 대단한 작품이다. 마치 역사 속 스토리가 명성황후와 고종 둘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외치듯 대부분의 무대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함께 노래하고 호흡한다. 당시 조선 민초들을 대변하듯 어린 여자 아이가 등장하는 무대 역시 ‘명성황후’가 일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국가와 민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걸 암시한다. 역동적인 단체 안무와 합창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작품의 힘이다. 수십 명의 노래를 뚫고 나오는 주연 배우의 가창력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논란이 많은 역사를 다루는 태도 역시 인상적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죽음을 극적인 이야기로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황후로 살아있을 때 가졌던 마음과 행동들에 주목한다. 죽음 역시 선악을 갈라 비난하고 분노, 슬픔을 자아내는 대신 자연스럽게 모인 민중들이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 순간 극장 전체가 장엄한 국장(國葬)을 치르는 공간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작품의 메시지와 표현 방식이 갖고 있는 힘과 공감 덕분이다.
초연 당시부터 사용된 경사진 원형 무대의 활용은 ‘명성황후’가 자랑할 만한 무기다. LED 패널로 현대적인 느낌을 더했지만, 시시각각 회전하며 무대의 깊이감과 입체감을 살리는 원형 무대의 존재가 작품의 한 요소를 차지한다. 많은 무대에 등장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명성황후로서 당당하고 기품있게 연기와 노래를 소화한 배우 김소현의 존재감이 유독 빛나는 작품이다. 고종과 홍계훈, 미우라 등 주요 배역 뿐 아니라 앙상블로 무대에 오른 모두가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지난 1월19일 공연을 시작한 ‘명성황후’는 다음달 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8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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