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나는 그 그림을 마저 그리기로 했다. 그림 속 소녀 옆에 내 딸이 꼭 그만할 때 좋아했던 것들을 그려 넣었다. 맛있는 간식을 들고 서 있는 다정한 엄마와 반갑게 일찍 퇴근한 아빠와 사이좋은 오빠를 그리고, 딸이 그토록 키우고 싶어 했던 고양이와 강아지와 금붕어도 그려주었다. 예쁘고 푹신한 깔개 위에 장난감도 놓아주고 창밖으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늘도 파랗게 칠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 어린 딸이 바라던 행복은 참으로 간단하고 소박하여 내가 주려면 다 줄 수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때도 부질없이 나만의 시각과 기대로 아이를 막거나 다그쳤을 것들에 새삼 후회가 몰려왔다.
지금 서른이 넘은 딸이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생각해 봤지만 그 애가 언제 제일 행복한지, 무엇을 바라는지, 많이 힘들 때도 꿈을 상상하면 여전히 설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전에도 지금도 내 아이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깜깜한 창밖처럼 안타깝고 적막한 밤이었다.
그날 이후 내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원래 그림을 많이 그려봤거나 잘 그리는 것도 아니지만 매일 그날그날 내 앞에 보이거나 떠오르는 것들을 낙서처럼 그려본다. 미술에 문외한이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상관없이 오히려 아무거나 그릴 수 있는 나의 미숙함을 즐기며,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종이와 물감으로 비가 오면 비를 그리고 눈이 오면 눈을 그린다. 아버지 생각이 나면 아버지를 그리고 어머니 걱정이 되면 어머니를 그린다. 윗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우는 아이와 달래는 사람들을 그려보고 배불리 먹은 뒤엔 배가 뚱뚱해진 가족을 그린다.
그러며 인종이나 체형에 관계 없이 사람마다 가진 아름다움도 깨닫고 내 호불호와 상관없이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귀여운 동식물의 모습도 찾는다. 전엔 썩 좋아하지 않던 색깔에도 뒤늦게 빠져 세상에 다양한 색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기도 하고, 살아있을 때조차 ‘사람의 먹거리’를 뜻하는 ‘고기’로 불리는 물고기들을 그릴 때면 안쓰러워 하기도 한다.
사실 내 그림은 아무 쓸모도 볼품도 없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부터 내겐 조금씩 달라지는 게 있다. 처음엔 그저 여러 색을 칠하고 놀며 나의 칙칙하고 무료한 시간을 달랬을 뿐이지만 뭔가를 계속 그리려다 보니 점점 사물을 열심히 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내 마음대로만 보고선 함부로 추측하거나 판단했던 것이 부끄러워 이제는 대상이 내게 보여주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과 내 부족한 그림이 다르듯이 비록 늘 후회하고 새로 깨닫는데도 내 언행은 여전히 경박하지만, 섣부른 편견과 어설픈 주관을 갖는 대신 조금이나마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그 자체로 볼 수 있길 희망하면서...
‘정물화’는 영어단어론 ‘스틸 라이프(still life)’다. ‘스틸’(still)은 ‘가만히’란 뜻도 있지만 ‘여전히’ ‘아직도’를 뜻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 ‘꽃이나 과일, 그릇같이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그린 그림’을 뜻하는 정물화가, 영어로는 ‘가만히’ 있지만 한편으론 ‘여전한 삶’의 의미도 갖는다는 것이 내겐 참으로 놀랍다. 생각해보면 그림 속에선 화병이든 강아지든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고 박혀있을 뿐이라 별다른 차이가 없고, 그러기에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서도 그렇게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늙은 어머니, 행복하거나 지친 사람들, 흘러가는 시간과 고여 있는 꿈, 그런 모든 것이 각각의 모양과 색들로 정물처럼 박제되어있으나 여전히 자기만의 의미와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위안도 주지 못하지만 지난 여름, 야근을 하는 딸의 밤을 함께 지켜주었듯이 그 모두의 스틸라이프를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