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티빙 오리지널 예능 ‘여고추리반’의 본질은 방탈출 게임에서 출발한다. 주어진 세계관에 몰입해 단서를 찾아 문제를 풀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물과 사건이 등장한다.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오고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누군가 설계한 서사 한복판에 초대된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탈출하기 위해 감금되는 방탈출 게임의 역설이 ‘여고추리반’에서도 반복된다. 공간과 사건 스케일이 생각보다 거대하다는 점만 빼면 그렇다.
방탈출의 조그만 ‘방’은 ‘여고추리반’에서 ‘학교’ 전체로 확장됐다. 수능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새라여고에 전학생 다섯 명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새라여고 교복을 입고 등장한 출연자들은 서로 말을 놓으며 빠르게 상황에 몰입한다. 학교 입구부터 교감선생님이 전학생들을 맞이하고, 담임선생님에게 각자 명찰을 받는다. 2학년 2반에 들어가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앉을 자리를 확인한다. 수많은 연기자들이 이미 각자 캐릭터에 몰입해 출연자를 새라여고 세계관으로 안내한다. 덕분에 ‘여고추리반’ 초반부터 출연자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넓은 세계를 이해하느라 바쁘다. 플레이어의 자유도가 높은 게임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추리반 5인방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은 ‘우리가 왜 이곳에 왔을까’다. 제작진이 숨겨둔 스토리와 의도된 장치들을 찾아 학교 곳곳을 헤매는 모습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장면이다. 초록색 약을 구하기 위해 보건실을 서성이고, 사라진 학생의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 빈 교무실을 훑는다. 주어진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시야를 좁히는 태도는 프로그램 연출자인 정종연 PD의 전작 ‘대탈출’과 정반대다. ‘대탈출’ 출연진의 목표는 공간과 이야기를 확장해가는 것이었다. 명확하게 주어진 문제(탈출)를 해결하기 위해 시야를 넓힐 단서를 찾는 데 집중한다. ‘대탈출’ 포스터에 적힌 “나가야 산다”와 ‘여고추리반’ 포스터에 적힌 “우리는 수상한 학교에 전학왔다”는 문구는 두 프로그램의 방향성 차이를 보여준다.
공간만 넓어진 게 아니라 시간도 많다. ‘대탈출’이 한 에피소드를 하루 동안 녹화해 2회 분량(약 2시간30분)으로 방송했다면, ‘여고추리반’은 한 에피소드를 여러 날 녹화해 16회 분량(약 10시간)으로 방송한다. 이는 과거 정 PD의 첫 작품인 ‘더 지니어스’가 실내에서 하루 녹화로 한 에피소드를 제작했던 것이 ‘소사이어티 게임’으로 확장돼 실외에서 2주 동안 녹화로 한 에피소드를 제작한 것과 비슷하다.
시간은 출연진이 상황에 더 깊게 몰입하도록 돕는다. 추리반 5인방도 제작진이 마련한 서사에 조금씩 빠져든다. 언뜻 지나쳤던 수상한 소재들이 커다란 후폭풍으로 돌아오고, 충격적이었던 사건이 더 충격적인 진실로 돌아온다. 추리반 멤버들이 매주 쌓은 경험은 녹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순도 높은 즐거움과 짜릿함,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멤버들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발로 뭔가를 걷어차는 등 녹화 중이란 사실을 종종 잊는다. 아무리 리얼 예능이 유행이라지만, 최근 방송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멤버들이 드라마 주인공처럼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탄탄한 서사의 영향도 크다. 원한을 품은 귀신과 실수로 퍼진 좀비 바이러스 같은 개별 사연 대신, ‘여고추리반’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지적한다.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부터 기성세대가 학생들을 어긋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문제까지, 추리반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끝엔 ‘지금 한국 사회는 고등학생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라는 메시지가 존재한다. '여고추리반'이 예능을 넘어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극단으로 치닫는 후반부까지 가지 않더라도, 새라여고는 이미 문제가 많은 학교다. ‘S반’이란 진학이 보장된 특별반을 무기로 선생은 학생을 압박한다. 학생들은 친구가 아닌 경쟁자가 돼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교장은 이미 경찰과 결탁해 단단한 신뢰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 ‘여고괴담’이 개봉하고 23년이 흘렀지만, 같은 주제가 여전히 유효하게 다뤄지는 현실이 ‘여고괴담’보다 무섭다.
‘여고추리반’에서 멤버들의 행동과 특징들은 새라여고 세계관에 영향을 미쳐 이들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예상치 못한 변수를 억지로 통제하는 대신, 서사의 일부로 녹이는 식이다. 마치 드라마 작가가 작품 속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다음 대본에 반영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그동안 일종의 심리 실험극처럼 제작된 정종연 PD 예능에서 보지 못한 모습이다. 정 PD 예능은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방에 실험자를 가두고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데이터를 얻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변수는 모두 통제됐다. ‘더 지니어스’와 ‘소사이어티 게임’에서 지켜야 했던 수많은 규칙과 ‘대탈출’에서 움직임을 제한하는 좁은 공간이 그랬다.
변화는 또 있다. ‘여고추리반’은 시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극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고인혜의 SNS와 ‘닭새라tv’ 유튜브는 실존한다. 시청자들은 지금도 새라여고 학생의 개인 SNS에 들어가 댓글을 남길 수 있고, 새라여고 소식을 전하는 어느 학생의 유튜브를 구독할 수 있다. 새라여고 세계관이 시청자들이 사는 현실과 연결됐다는 의미다. 좁은 공간에서 시작한 실험극은 방구석을 탈출해 방대한 드라마 세계관을 거쳐 결국 우리가 사는 현실로 걸어 들어왔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작진의 작품관이 또 한 번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이들이 그리는 세계는 다음엔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어떻게 연결될까. 뭐든 좋지만, 그전에 ‘여고추리반’ 시즌2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열망이 제작진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찝찝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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