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최근 방송가는 역사왜곡 논란에 민감하다. SBS ‘조선구마사’가 2회 만에 방송을 취소했고, 아직 방송 전인 JTBC ‘설강화’는 벌써부터 여러 차례 해명을 내놓기 바쁘다. 영화계엔 100만 관객도 모으지 못한 영화 ‘나랏말싸미’의 전례가 있다. 우리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태도로 이야기를 보여주느냐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조선시대 실존인물 정약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는 이처럼 모두가 사극에 예민한 시기인 지난 31일 개봉했다.
‘자산어보’는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은 적다. 역사의 빈 공간에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은 식민지를 겪은 우리 역사에 아쉬움을 느끼며 근대의 흔적을 찾다가 자산어보를 만났다. 만약 타의가 아닌 자의로 근대를 맞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욕망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유배지에서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받아 책을 쓴 정약전의 이야기를 자산어보 서문에서 읽고 둘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를 상상했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를 “기존 사극 기준점에서 벗어난 영화”로 정의했다.
“관점을 바꿨어요. ‘왕의 남자’나 ‘황산벌’을 찍을 때는 참고할 한국 사극이 별로 없었죠. 제가 찍는 게 기준이 되는 시기였어요. 기존 사극이 영웅이나 사건을 다루는 건 집단주의 관점이에요. 공동체와 국가 중심인 거죠.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집단주의 관점으로 조선의 근대성을 찾으면 갑오개혁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와요. 반대로 개인주의 시선에서 근대를 보면 가장 정점은 동학혁명이에요. 프랑스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해서 근대가 형성되지 못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동학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공무원 행동 수칙을 담은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의 세계는 수직사회 지향했어요. 정약전은 상놈인 창대에게 격을 부여하는 수평사회를 지향했고요. 자산어보는 목민심서가 구별돼 있으나 다른 게 아니라 서로 벗이 돼요. 굉장히 쉬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산어보’를 흑백으로 제작하는 건 처음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망해도 적게 망해야지”라며 흥행에 성공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가 찍은 사극과 다른 접근을 시도해보려고 한 것도 흑백을 선택한 이유였다. “흑백은 새롭고 세련되고 특별한 것”이라며 “흑백영화가 구식이란 생각이 구식”이란 말도 했다.
“흑백영화를 보면 내가 소환되는 느낌이 들어요. ‘저 시대는 저렇구나’ 생각하며 그 시대에 가깝게 가는 거죠. 관객들이 ‘자산어보’를 보며 즐거웠다면 인물들과 같이 놀아서 즐거운 거예요. 제가 사극을 많이 찍어봤으니 ‘내 사극을 피해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또 컬러영화는 ‘자산어보’와 덜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와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려면 다른 형식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약전이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의상이나 시대를 바꿀 순 없었어요. 그럼 가장 쉬운 선택이 색깔을 바꾸는 것이었죠. 인물 내면에 집중시키고 사건보다 사연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선택, 그게 흑백이었어요.”
영화 ‘황산벌’과 ‘왕의 남자’부터 ‘사도’와 ‘동주’까지. 이준익 감독은 20여년 간 사극을 여러 편 찍은 대표적인 한국 영화감독 중 하나다. 역사 왜곡 논란 없이 사극을 찍어온 이야기도 들려줬다.
“제가 사극을 찍는 기준은 다양해요. 사실 지나치게 고증에 집착하려면 영화를 찍지 말아야 해요. 작품 특성에 따라 영화적 허용치가 존재하거든요. 모든 영화가 고증에 충실한 건 폭력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산어보’는 실존인물을 다루지만 콘텍스트가 비어있어요. 창작의 공간으로 할애된 합당한 허구인 거죠. 고증으로 기록된 정약용의 삶과 정약전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게 할까요. 정약전을 보여주기 위해 정약전만 그리면 위인전이 되고 인물 미화나 우상화가 되겠죠. 정약전을 똑바로 보여주려면 상대 배역을 뚜렷하게 세워줘야 해요. ‘자산어보’에선 정약전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창대를 뚜렷하게 기능하게 이야기를 짰어요. 반대편에선 정약용을 똑바로 볼 수 있게 정약전을 선명히 그려주면 돼요. 한 사람만 그리면 ‘틀렸다, 맞았다’가 되지만, 상대 개념으로 하면 ‘같다, 다르다’고 얘기하게 되는 거죠. 약전과 약용의 다름을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기능하게끔 창대를 그렸어요.”
이준익 감독의 작품 세계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진지하고 무거운 사극과 가벼운 코미디 사극을 오가고, ‘라디오스타’와 ‘소원’, ‘변산’ 같은 현대극도 중간 중간 찍었다. 이 감독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며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성격이 임기응변에 중구난방이에요. 제가 그래요. 명확한 신념도 없고요. 눈앞에 있는 것에, 현재에 충실하자고 생각하며 살아요. 이 생각이 어떤 부작용이 낳을지, 어떤 성과를 낼지에 관심이 없어요. 좋으면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제 실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아서 ‘이거 아닌데’ 싶고, 어떤 때는 은퇴해야지 하기도 했어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은퇴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나중엔 또 제 영화가 칭찬받네요. 과거를 돌아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워요. 집에 제 영화 포스터 한 장 없어요. 오늘을 살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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