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세진(이유미)은 돈이 필요하다.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서다. 밝은 표정과 꾸밈없는 목소리로 “애 뗄라고”라고 말하는 세진의 모습이 여러 번 반복된다.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도움을 주려한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는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려는 18세 세진과 그를 돕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세진은 우연히 가출 4년차인 동갑 주영(안희연)을 만나고, 20대인 재필과 신지가 합류해 함께 어울린다. 평범한 교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길거리, 숙박업소, 교회, 유흥주점 등을 헤맨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누구도 원치 않던 폭력을 일으킨다.
뛰어난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영화다.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이 그랬듯, ‘어른들은 몰라요’도 영화라는 걸 잊게 하는 몰입도 높은 장면이 이어진다. 의도된 것처럼 서사가 뚝뚝 끊기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집중을 잃지 않고 보게 하는 건 세진과 주변 인물들이 사는 세계가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이면 지나치게 튀고 억지스럽게 느껴졌을 자극적인 장면들이 이 영화에선 그저 숨 쉬듯이 녹아든다. 어른이 아니어도 잘 몰랐을 10대 사회의 이면을 생생하게 재현한 성취가 놀랍다.
청춘 세대를 존중하는 태도 역시 눈에 띈다.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문제투성이다. 임신부터 유산, 가출, 흡연, 폭력, 욕설, 도난 등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행동과 선택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화는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인물과 서사를 통해 드러내는 잘못을 하지 않는다. 판단하고 단죄하고 잔소리하는 대신 이들이 헤매고 발버둥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거리를 둔 침묵 만이 이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방법이란 알고 있는 듯하다. 아무 맥락 없이 여러 번 등장하는 롱보드 장면은 인물들을 지켜보는 영화의 태도와 같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라는 세진의 대사로 이 낯선 이야기가 성립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박화영’에서 임신한 채 사라진 세진이 ‘어른들은 몰라요’에선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두 영화는 비슷하다. 쉬지 않고 담배를 피고 숨 쉬듯 욕설을 내뱉는 장면들이 이번에도 스크린을 채운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불편한 전개도 여전하다. 다른 점도 있다. ‘박화영’이 정면으로 다룬 10대들의 이성 관계와 수직적인 세계 속 폭력은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전작이 순간의 화와 욕망을 참지 못하거나 뭔가에 절실한 인물들로 채워진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크게 바라는 것도, 안타깝거나 아쉬운 것도 없는 나른한 분위기가 됐다. 같은 인물과 배우가 등장한다고 ‘박화영’ 후속작이나 스핀오프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연기하는 느낌 없이 자연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완성시켰다. 특히 세진 역의 배우 이유미는 놀라운 연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대단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룹 EXID로 활동해온 안희연도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며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배우 출신인 감독 이환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오는 15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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