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산책을 하다 우연히 한 나무 팻말을 보았다. 산책로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 누군가 엉성한 나무판자에 매직으로 ‘마음쉼터’라고 써서 꽂은 것이었다. 애초에 그곳은 길에서 벗어나 눈에 띄지도 않고 일부러 들어갈 만하지도 않았다. 꽃나무도 없고 그늘이나 의자도 없어 쉴 만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처럼 눈이 나쁜 사람이 문득 멈춰 섰다가 길옆에 폐허처럼 버려진 공터의 팻말을 발견했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 그 팻말을 보았다. 그리고 대체 왜 그곳이 마음쉼터인지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특별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 팻말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공터너머의 하늘은 건물이 가로막지 않아 유난히 광활하게 열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하늘 밑으로 저 멀리에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누군가 그 자리를 마음쉼터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그 십자가 때문인지 특별히 넓게 열린 하늘 때문인진 모르지만 그 날 이후 마음쉼터는 나의 유턴지점이 되었다. 그 곳에서 유턴을 해 집까지 걸으면 1만 보를 채울 수 있기도 했지만 잡다하게 머리와 가슴에 이고 지고 걷던 마음들이 왠지 툭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을 끄고 잡목같이 우거져있던 갈래 갈래의 마음을 그곳에 묻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엔 내내 기도를 하였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어머니들의 평안을 빌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조카를 생각하다 친척과 지인의 안녕을 바랐다.
너무 바라는 게 많아 염치가 없어 틈틈이 감사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론 내 기도의 구성이란 너무 편협해, 지평을 넓혀 세상과 환경이 나아지도록 기도도 했다. 그러나 매번 기도의 끝은 이런 기도를 드리기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거나 고백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돈도 없이 가게에서 온갖 주문을 하거나 이미 다 시켜놓곤 뒤늦게 돈이 없다고 생떼를 부리는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주절주절 기도를 했다.
최근, 둘레길에 공사 차량이 서고 인부가 오가더니 마음쉼터가 사라졌다. 허접했지만 소박해서 더 진심이 느껴졌던 팻말도 뽑혀나가고 ‘공사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줄과 노란 깃발이 세워졌다. 인부들은 그 자리에 내가 묻었던 마음을 알까. 그곳에 아무리 대단한 걸 심고 만든다 해도 누군가에겐 전혀 보배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나 알까. 나는 ‘마음쉼터’ 팻말 대신 세워진 출입금지 줄 너머의 노란 깃발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열려있고 저 멀리 십자가도 그대로였지만 내게는 그것이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난 처음부터 그곳을 목적지나 반환점으로 계획하고 걸었던 게 아니었다. 알고 찾아간 마음쉼터도 아니었다. 지도 없이 걸어간 길 끝에서 그저 기도를 시작하며 발을 돌렸을 뿐이었다. 기도는 어디서나 할 수 있었고 마음쉼터도 도처에 있었다. 나는 다시 여전히 미성숙한 바람뿐인 기도를 빌고 또 빌며 발길을 돌렸다. 구구단 외듯 바치는 기도가 하늘까지 닿지 못해도 내 집까지 나를 든든하게 이르게 할 것을 믿었다. 사랑은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비록 내가 부족해도 오고 갈 수 있는 것임을 나는 믿었다. 나는 기도 속에 마음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