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극의 전개도, 그렇다고 아름다운 영상미를 담아낸 스틸도 딱히 없는 영화의 126분 러닝타임 내내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신자라서가 아닌 두 노배우의 열연에 입혀진 두 교황의 우정이었다. 얼마 전 오스카에서 영화‘더 파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안소니 홉킨스의 베네딕토 16세 연기와 프란치스코로 분한 조나단 프라이스의 열연은 과히 명불허전이 아닐 수 없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미 해방신학의 선구자로서 진보적 성향을 지닌 교황이었다. 그에 반해 현재의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해방신학을 비판한 보수신학자였다. 어쩌면 가톨릭 교계 내에서는 신앙적 방향의 대척점에 서있는 관계였었다. 그럼에도 두 교황의 대화는 상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신앙에 대한 가치를 분열이 아닌 다름의 인정으로 받아들인다. 보수와 진보, 두 개의 진영논리에 포획당한 대한민국 속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영화로서가 아닌 치유와 화합의 메시지로서 그 가치는 충분한다.
한국 추기경으로 혼자 남으신 염수정 추기경은 정진적 추기경 선종 미사에서‘김수환 추기경이 아버지였다면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라며 그를 추모했다. 영화‘두 교황’의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16세처럼 우리의 두 분 추기경의 역할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우리의 시대상이 달랐기에 그 역할도 달랐을 것이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서임을 받은 스테파노 김수환 추기경은 군인이 정치를 하던 어두웠던 시절, 한국 민주화의 기댈 언덕이었다. 명동성당은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과 시위 학생들의 도피처였으며 한국 사회 양심의 보루였다. 그 중심에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혹자들은 그를 민주투사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톨릭 사제로서의 당연한 의무였다. 암울했던 시대는 가톨릭의 역사적 소임을 요구했다. 민주화 이후 많은 국민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사제로서의 용기 있는 언행에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니콜라오 정진석 추기경은 2006년,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추기경 서임을 받았다. 북한의 인권문제에 단호했다. 때론 어지러운 교계의 질서에 엄격했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한국 가톨릭의 안정적 역할과 교세를 추구했다. 그는 투병 중에도 연명치료를 거부했고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사제로서의 삶은 늘 검소하고 소탈했다. 가는 글에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묵주 하나뿐이었다.
한국 가톨릭은 모범적 길을 걷고 있다. 청년층으로부터 외면 받는 종교계에서 젊은 신자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종교는 가톨릭이다. 시대가 요구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이후 정진석추기경의 사회통합의 쓰임으로서의 가톨릭 지향점이 이룬 선순환적 결과이다. 두 분 추기경의 역할은 대한민국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두 분 추기경이‘아버지와 어머니 같았다’는 염수정 추기경의 추도사 배경이다.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은 경기 용인의 가톨릭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옆에는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묘가 있다. 영화‘두 교황’처럼 두 분은 선대와 후대 추기경으로서 신앙적 담론들을 나누실 것이다. 외롭지도 않으실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에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새겨져있다. 서로 다른 역할을 하였던 사제의 길이었지만 두 사람의 희망은 같았다. 살뜰한 인간존중이었다. 모든 신앙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두 추기경의 천국에서의 영면을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