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식대로 이 책을 해석하면 <가끔 이기적이 되는 기술>이다. 번역가는 책 제목을 지나치게 도발적으로 해석했다. 나는 오히려 <우리는 가끔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로 했어야 하지 아닐까 자문해 본다. '뻔뻔함'은 인간이기를 그친 모습이다. '뻔뻔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존감, 더 나아가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自己愛)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끔은 뻔뻔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세상을 향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Art'를 우리 말로 하면 '예술"이지만,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오늘날 테크놀로지의 어원) '라는 단어가 로마로 오면서 '아르스(ars)'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art'를 '기술'로 번역해도 된다. 인생은 허약하고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그런 삶을 연장하는 열쇠가 '기술'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테크네'가 나온다. 여기서 '기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나온다. '테크네'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상상하지도 못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솜씨'다. 로마로 와서, 호라티우스는 그리스어 '테크네'를 라틴어 '아르스'로 번역하였다.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아트'(art)의 어원이다. 여기서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어떤 분야든 최선의 경지를 지칭하는 용어다. 예술가는 그 순간에 몰입하여 이질적인 것들에서 최고를 선택하여 표현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 "절제하는 일", "탁월성을 따르는 것"에서 남들보다 앞서는 것에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기쁘게 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탁월함의 수준까지 내 자신을 사랑하되 올바른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또 절제에 있어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또 잘 보여주는 이가 애덤 스미스이다. 그의 『도덕감정론』의 인간은 '호의를 베푸는 이기주의자'이고, 『국부론』의 시장은 이런 인간들이 뛰노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곳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기심이라는 표현이 'selfishness(제멋대로임, 이기적임- 남의 이익을 침해해서라도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아니라, 'self-love(자기애, 자기에 대한 사랑)'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은 self-love이다. 그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하듯 남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남을 대할 때도 다르다. 남이 내게 손해를 입히면 싫은 것처럼, 나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건 양심이 충고를 하는 소리이다. 요약하면, 애덤 스미스가 전제한 것은 시장에 나온 인간이 selfishness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self-love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게 호의를 가진 자기 사랑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시장이 속임수가 없는 공정한 가격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속에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때문에 독점도 없고 착취도 없다. 임금이나 이윤이 특정한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도 제한된다. 그리고 분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게 한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찾은 신의 질서의 법칙이다. 이때 국가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공공기관과 공공사업 운영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좀 복잡하지만, 인문 운동가는 잘 구별하고 나누는 사람이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