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17년 전 오늘, 우리나라 재판부가 부부간 성범죄를 최초로 인정했다. 2004년 8월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강제추행해 다치 게 한 45세 남성에게 강제추행 치상 등의 혐의를 적용해 징역 2년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했다. ‘남녀관계’와 ‘집안일’로 사소화되던 부부 사이의 강압적 신체접촉이 ‘범죄’로 규정된 것이다. 결혼이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판결을 계기로 명확해졌다.
부부간 강간죄가 인정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5년 뒤인 2009년 1월16일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는 외국인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편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법률이 강간죄를 규정하는 이유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여성의 정조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봤다. 이에 따라 부부 사이에 발생한 사건에도 성폭력범죄 처벌법의 특수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배우자와 신체접촉도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은 교과서적 대명제다. 하지만 이같은 원칙이 법정에 수용되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앞서 1970년 3월 대법원은 부부 사이에 강간이 발생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당시 대법원은 다른 여성과 동거 중이면서 아내를 힘으로 제압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남편에 무죄를 선고했다. 남편이 동거녀를 떠나 부부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으므로 ‘남편에게 정교 청구권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즉, 남편이 배우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2004년 아내 강제추행 사건에 유죄가 선고되기 전까지 30여년간 우리나라에서 ‘배우자의 성폭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개선된 것은 없어요”
법원의 판결이 변했지만, 부부간 성범죄는 여전히 가정사로 치부된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현장 활동가들은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부간 성범죄 피해를 입증할 방법이 요원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았다.
심각한 폭력이 동반돼 피해자의 신체에 사건의 흔적이 남은 사례가 아니라면, 부부간 성적 접촉은 공권력이 개입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강간 사건이나 가정 내 아동학대 범죄는 공론화가 충분히 진행돼 사회적 경각심이 높지만, 부부간 성범죄는 공론화 기회조차 없었다. 부부는 성적인 접촉이 무한정 허용된 관계라는 인식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부간 성범죄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가 허술한 것도 문제다. 부부간 성범죄는 대부분 형사사건이 아닌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된다. 가정보호사건에서 가해자는 형사처벌이 아닌, 보호처분을 받게 되며 전과도 남지 않는다. 가해자가 처벌을 면할 가능성도 높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제9조는 피해자가 처벌을 희망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경제적·생활 공동체라는 부부관계의 특성상 피해자는 쉽게 처벌을 단념하게 된다. 가해자와 분리된 생활을 담보할 수 없으며, 가해자가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피해자가 처벌을 함께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아직까지 부부 또는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범죄는 ‘그들만의 문제’로 축소되고 있다”며 “사회 전반에 가부장제 문화가 짙고, 법정은 물증 위주 판단에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부부간 성범죄 피해자의 법률 지원 활동을 하며 재판에 참여하면, 재판부는 여전히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을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2차가해를 되풀이한다”며 “성인지 감수성에 개선의 여지가 많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여성폭력 피해자의 10명 중 6명은 배우자·애인에 의한 피해를 경험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지난해 여성폭력 피해 상담 통계에 따르면 초기상담 1084건 가운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이 59.4%로 과반을 차지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전·현 배우자, 전·현 애인, 데이트 상대자가 42.9%(465건)으로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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