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음을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치명적인 적들조차 운명적으로 연결돼 있다. 자아와 타자의 역설적 관계다. 관용과 협력 없이 팬데믹 같은 재앙을 넘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길고 복잡한 규율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럴수록 자유와 혁신은 시들어간다. 민주주의도 역설적이다. 다수의 힘은 가장 민주적인 정부도 투표로 끝장낼 수 있다. 온전히 관용적인 사회도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다. 관용자들이 비 관용자들을 참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복리를 조화시키는 건 쉽지 않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동행은 늘 아슬아슬하다.
시간이 흐르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삶도 처참하게 실패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진정한 혁신보다 지대 추구에 몰두하는 자본주의로는 지속적인 번영을 이룰 수 없다. 기업은 사람들과 지구촌의 문제를 풀면서 이익을 얻어야 한다. 이제 주주 이익 극대화를 넘어설 때가 됐다. 지금은 인간의 창의와 혁신능력이 자본인 시대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가진 이들은 소수다. 그들을 키워낼 토양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체제의 불평등을 누그러트릴 해법은 거저 얻을 수 없다. 투기적 거품에 영혼을 빼앗기게 하는 사회에서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는 얼마나 공허한가. 다른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은 빈곤하다.
<어린 왕자>의 핵심 키워드는 ‘길들여진다’ 말이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말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슬프단다." 그러자 여우가 말했다.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져있지 않거든." 그러자 어린 왕자가 말했다. "길들여진다는 게 뭐지?" 여우가 답한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 일 거야.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 관계를 시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확장된다. 인생의 사는 맛은 활동과 관계가 많고, 잘 이루어지며, 그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선은 관계의 폭을 넓게 하고, 그 관계에 충실하며, 끊임없이 접속을 유지하면, 원하는 활동이 확장되는 것을 최근에 배우고 있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다.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속에서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어딘 가에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 지금의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다. 9월도 그렇게 맞이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