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연중 가장 활짝 웃는 순간을 꼽자면 명절 아침이다. 명절 당일 오전 8~9시 인터넷은 최고의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이다. 전국 거실에서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표정으로 돌변한 집안 어르신이 다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먼지 쌓인 책을 뒤적거린다. 그가 우뚝 서서 홍동백서·조율이시를 읊조리는 동안 다른 사람은 접시 수십 개를 나른다. 망한 팀플처럼 어색한 단막극을 지켜본 자손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기가 막힌 말재간을 뽐내며 감상평을 공유한다. 우승작들의 명성도 상당한데, 가장 잘 알려진 한줄평 ‘진짜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명절에 차례 안 지내고 호캉스 간다’는 2017년 설날 챔피언이다.
왕중왕전은 항상 여자들이 모인 곳에서 열린다. 이용자 대부분이 10~30대 여성인 인터넷 커뮤니티, 여성 팔로워가 많은 SNS 계정 등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큰엄마가 봉고차에 집안 여자들을 모두 태워 강릉으로 내달리고 있다’는 명절 파업 생중계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정말 뵙고 싶으면 음식 차리지 말고 분신사바를 해야지. 조상님 잘 지내시죠..? yes..’는 명확한 목표 의식과 실용주의가 돋보인다. 올해 추석 우승작 후보로 모 여성 커뮤니티에 오전 8시경 등장한 ‘시작됐다. 부침개에 절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연휴가 끝나고 우울할 때마다 떠올리며 힘을 얻고 있어 개인적으로 감사하다.
비슷한 분노를 공유하기 때문일까. 명절 아침 여자들이 선보이는 냉소와 풍자는 재미있는 동시에 통쾌하기까지 하다. 집안 남자들이 가사노동을 외면할수록, 남존여비 K-유교 가풍이 강할수록 그 집 여자들의 재치는 더 뛰어나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과감한 어휘로 부조리를 비꼰다. 그러면 풍자의 대상은 유서 깊은 전통에서 단숨에 구태의연한 골동품으로 초라해진다. 머릿속 거친 생각은 아무리 순화된 버전이라도 입 밖에 내면 어르신들을 당황케 하는데, 대개 여자들의 등짝에 부모님의 매서운 손바닥이 꽂히며 얼렁뚱땅 상황이 수습된다.
명절 아침이 피크타임일 뿐, 언제든 비슷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차별적 악습 대부분은 여자들의 풍자를 맞닥뜨리면 너절한 밑천이 드러난다. ‘암탉이 울면 나가라 망한다’는 우국지정은 ‘그렇게 허접한 나라면 망하는 게 낫다’는 반박으로 효력을 잃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예언은 ‘여자 셋에게 깨지는 게 접시뿐일까’라는 서늘한 경고를 받고 퇴장했다. 그러는 동안 여성의 탈정치화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다양한 분야와 직능단체에서 여성 네트워크가 자리 잡았다.
그러니까 세상이 오랫동안 여성의 위트와 유머를 금지할 만했다. 1908년까지 웃긴 여자는 법에 따라 집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형법대전은 오출사불거(五出四不去) 규정에서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로 ‘말이 많은 것’을 명시했다. 그런 여자는 가족공동체를 이간질하고 불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외국의 상황은 더 가혹했는데, 유럽과 영미권에서 유창한 언변으로 가톨릭 또는 프로테스탄트적 사회질서에 질문을 던진 여자들은 모두 불에 타거나 목이 잘려 죽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말과 웃음을 무서워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가장 정확한 성평등 척도는 웃긴 여자들일지 모른다. 여성의 학력, 소득, 기업 임직원 성비 등 통상적인 성평등 지표는 실제와 동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석·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성중심적 학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여성들이 퇴근 후 독박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사회라면, 여성의 소득이 아무리 상승해도 성평등을 달성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웃긴 여자들은 탄광의 카나리아다. 통계로 드러나지 않는 성차별적 모순점을 포착해 유쾌하게 고발한다. 여자들이 웃길수록 그 사회의 불평등은 빠르게 개선된다고 전망해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꽤나 희망적이다. 매일 마주치는 평범한 친구들도 입만 열면 재미있는 말을 쏟아낸다. 명절마다 내 등짝을 털었던 엄마와 이모들조차 언제부턴가 부쩍 유쾌하다. 3년 연속으로 지상파 방송국의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단독 대상을 받았다. 요즘 여자들 너무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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