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이동하는 배영재(박정민)가 고민에 빠진 장면이 넷플릭스 ‘지옥’에 등장한다. 오늘 막 태어난 튼튼이를 보러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직진, 갱년기 우울증에 빠져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준원이 형을 찾으러 가는 길은 유턴(U-Turn)이다. 고민 끝에 욕을 내뱉으며 영재는 차를 돌린다. 그날 밤 사건을 겪고 낯선 곳에서 깨어난 영재는 홀린 듯이 병원으로 향한다. 고민의 순간,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보다 위기에 빠진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큰 새 주인공에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1~3회를 보는 동안 배우 박정민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3회 마지막 장면에서야 짧은 욕을 내뱉으며 등장하는 배영재 PD는 같은 세계관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옥’의 두 번째 주인공격이다. 동명의 원작 웹툰에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정민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찍을 당시 웹툰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연상호 감독과 전작 ‘염력’을 작업할 때 ‘지옥’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뒤늦게 떠오르기도 했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박정민은 지난 19일 ‘지옥’이 공개된 후 몇 번이나 돌려봤다고 털어놨다.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잘 못보는 편인데도 그랬다.
“‘지옥’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1~3회, 4~6회 색깔이 많이 다르네’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출연하지 않는 앞부분에 대한 부담이 있었거든요. 아예 다른 색깔, 다른 방향으로 가는 드라마란 생각에 조금 안심했습니다. ‘지옥’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저도 지금 시기의 화살촉 멤버, 혹은 새진리회를 신봉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작품에선 극적으로 표현돼서 그들이 굉장히 악한 사람들로 인식될 수 있어요. 과연 난 그들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일까,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일까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나약하고 휩쓸리고 선동당하고 의지하고 싶지 않을까요.”
박정민은 처음 ‘지옥’ 대본에서 본 배영재에서 ‘방관자’를 떠올렸다. 드라마가 다루는 사건의 바깥에서 지켜보는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도 분명 대충 만들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외부에 있던 인물이 사건의 중심에 들어가 말하고 행동을 한다. 유독 짜증이 많은 배영재 PD는 그렇게 탄생했다.
“대본에 적힌 모든 상황이 배영재에게 짜증 나는 상황이었어요. 짜증 나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는 사람으로 설정한 거죠. 짜증 나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요. 관객들이 ‘지옥’ 1~3회를 보면서 하고 싶었던 말이나 욕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단 생각도 해봤어요. 어디까지가 대본에 있는 대사고 어디서부터 애드리브인지 저도 잘 구분이 안 돼요. 다시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차 안에서 구시렁대는 대사는 다 제가 만든 게 맞아요.”
배영재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 여러 명 등장하는 ‘지옥’에서 가장 평범한 인물 중 하나다. 1부를 책임진 진경훈(양익준)처럼 2부에선 배영재가 이 낯선 세계관을 시청자 가까이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박정민은 “세상 어딘가 진짜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범한 인물 연기를 좋아해요. 그런 작품(‘파수꾼’)으로 데뷔하기도 했고요.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하는 편은 아니에요. 관객들이 물 흐르듯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지옥’은 인물은 보통 사람이고, 그가 처한 상황이 새로웠어요. 인물이 어떻게 반응할지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배영재가) 짜증을 내는 반응이 나온 거죠. 전 영화는 시각적인 게 반, 들리는 게 반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작품을 볼 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처럼 느끼도록 연기하고 싶어요.”
‘지옥’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밀어내고 빠르게 넷플릭스 전 세계 순위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정서가 담긴 드라마가 어떻게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을까. 박정민은 우리나라만 겪는 현상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시청자들에겐 ‘지옥’이 재밌겠죠. 은유가 굉장히 많잖아요. 전 한국 시청자들만 재밌을 줄 알았는데, 한국만 해당하는 사회 현상이나 인간의 특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한국 사람이면 더 깊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외국인들도 온갖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기에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래서 외국 시청자들도 ‘지옥’을 재밌게 보시는 것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전해 들은 건 없지만, 배영재가 시즌2에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시즌1에서 같이 연기하지 못한 김신록 선배님이나 아인씨, 양익준 감독님, 이레 배우와 만나고 싶어요. ‘지옥’ 세계관에 계속 남아있고 싶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