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온전치 않아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 왕실의 빽빽한 일정표를 따라 수많은 규칙이 펼쳐진다. 숨이 막히고 멀쩡한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 화장실로 달려간다. 속사정이 이해가 되려고 하면 멀어지고, 멀어지려고 하면 다시 내 이야기로 다가온다. 주인공을 비롯해 모든 장면이 지나치게 아름답다. 누군가 실제 겪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하다.
‘스펜서’(감독 파블로 라라인)는 1990년대 초 영국 왕실이 샌드링엄 별장에 모여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 3일에 함께한 다이애나 스펜서 영국 전 왕세자비를 가까이에서 따라간다. 직접 운전하다 길을 헤매고 갑자기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가느라 여왕보다 늦는 등 별장에 도착하는 과정부터 험난하다. 식사와 외출을 할 때마다 정해진 드레스를 입어야 하고 일부러 난방을 하지 않고 커튼을 고정하는 등 까다로운 왕실의 전통과 규정에 다이애나는 답답해한다. 발길이 닿는 대로 밖에 나온 다이애나는 별장 근처에 있는 자신의 옛집을 찾아 나선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잘 모르는 다이애나를 이해하게 되는 영화다. 영국의 로열패밀리이자 시대의 패션 아이콘이고 어느 정치인보다 유명해 항상 파파라치가 따라붙는 다이애나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상황을 겪는지 보여준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 설명하지도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주지도 않는다. 그가 겪는 일들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고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다이애나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거나 공감하지 못하면 괴팍한 정신질환자의 일상에 지루해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에 젖어 들었다면, 과거 인물이 느꼈을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리며 깊이 이입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나를 되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국 왕실의 전통이 이해되지 않는 수준은 아니다. 역사 속 인물들과 그들이 만든 이야기를 함께 느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엔 수긍이 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소외된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있으면, 전통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그럼에도 자신을 되찾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감독 셀린 시아마)에서 보여줬듯 클레어 마통 촬영 감독은 또 한번 모든 장면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다이애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다. 이미 전세계 여우주연상 27개를 휩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오는 27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주연상 후보로 올랐다.
오는 16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