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여성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뜻밖의 해방을 선사했다. 매일 병행한 바깥일과 집안일에서 확진과 동시에 일제히 손을 뗐다. 완전한 퇴근이 생경한 여성들은 뭘 해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일주일을 보냈다.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본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결혼 이후 계속해서 직장인, 가사노동자, 주양육자로 ‘쓰리잡’을 뛴 50대 여성 숙미, 경임, 여순씨가 각각 인터뷰를 통해 재택치료 경험을 공유했다.
‘종일 넷플릭스 보기’ 해보니 왜 하는지 알겠더라
숙미(59세, 보험설계사)씨는 딸들의 취미생활을 이해하게 됐다. 그는 백화점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유통회사, 홈쇼핑회사 등으로 이직했고, 현재 15년 차 보험설계사다. 직장 생활을 쉰 적은 없다. 현재 동거 가족은 큰딸과 남편으로, 모두 직장인다. 숙미씨는 지난 2월24일 확진, 자택 안방에서 격리했다.
숙미씨는 영화를 좋아한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에는 딸들과 극장에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보험설계사 업무 특성상 휴일에도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다. 평일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하는 일과가 반복됐다.
“딸들이 종일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게 이해가 안됐는데, 갑자기 방에 들어앉아 쉬게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큰딸이 핸드폰에 넷플릭스(OTT 애플리케이션)를 설치해 줬는데, 재미있는 영화가 많이 있었어요. 드라마도 실컷 봤어요. 애들이 ‘정주행’이라고 하는 걸 저도 해봤어요.”
“남편이랑 딸은 오전 6시30분에 출근해요. 둘 다 직장이 멀고, 출근 시간도 이른 편이거든요. 저는 9시30분까지 출근이고, 사무실이 집과 가까워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하고 세탁물을 정리해요. 저녁에 먹을 수 있게 찌개도 미리 끓여놓고, 퇴근길에 마트에서 사 와야 하는 것들을 체크해요. 거실에 보이는 먼지도 치우고, 양치를 하다가 화장실에 락스도 뿌려두죠.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9시에요.”
“평소에는 매일, 매 순간 할 일이 있으니까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을 오래 쳐다볼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도 안 하고, 밥도 안 하고, 빨래도 청소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나 이제 뭐 하지?’ 싶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으로 직행하는 게 일상인데, 그렇게 못하니까 격리 첫날에는 괜히 어색해서 안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양말과 티셔츠를 몽땅 손빨래했어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길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취업 여성의 가사시간은 2시간25분, 취업 남성의 가사시간은 50분이다. 맞벌이 부부의 상황도 큰 차이가 없다. 맞벌이 가구의 여성 가사시간은 3시간7분, 남성은 54분이다. 아내 외벌이 가구에서도 여성의 가사시간은 2시간36분으로 남성 1시간59분보다 길다.
죄책감 없는 휴식, 산후조리원 나오고 처음이었다
경임(50세, 은행원)씨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밥상을 받아봤다. 그는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한 은행에서 근무한 장기 근속자다. 결혼과 출산 시점을 제외하고는 3일 연속으로 휴가를 낸 경험이 없다. 현재 동거 가족은 10세, 12세인 두 아들과 남편이다. 경임씨는 이달 4일 확진, 자택 안방에서 격리했다.
경임씨는 배우고 싶은 것이 많다. 유행하는 취미생활은 다 해보고 싶을 만큼 배움에 욕심이 있다. 하지만 은행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여력을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할애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남편이 밥상을 차려준 건 처음이었어요. 이런 호사를 언제 누려보나 싶었어요. 남편뿐 아니라, 누군가 쉬고 있는 제게 밥상을 차려다 대령한 건 십수년 전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한 이래로는 처음이었죠. 남편이랑 아이들이 집에 있는 모든 간식거리를 제가 격리하고 있는 방에 연결된 발코니 앞에 가져다 놨어요.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남을 챙기는 게 그동안 내 일이었는데, 내가 챙김을 받으니까 어색하고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어요.”
“집과 은행만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어요. 회사에 아이 핑계로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아이에게는 회사 핑계로 소홀해지지 말자는 게 제 신조예요. 그런데 확진돼서 본의 아니게 급정거를 하게 되니까 불안했어요. 잠을 자다가도 평상시 출근했던 시간이 되면 깜짝 놀라고, 아이들이 등교할 시간이 되면 화들짝 소름이 돋았어요.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있다는 사실에 적응되기까지 3일이 걸렸어요.”
“저는 하고 싶은 게 엄청 많아요. 운동을 좋아해서 트레이닝도 받고 싶고, 음악과 춤을 좋아해서 방송 댄스도 배우고 싶어요. 전문적인 배우가 되기는 늦었지만, 연극을 배워서 공연도 해보고 싶어요.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워킹맘들은 다 그런 죄책감이 있거든요. 나를 위해서 시간을 쓴다는 게 죄스러운 마음이요. 재택치료 기간 특별한 걸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죄책감 없이 쉴 수는 있었어요.”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를 도맡는 주 양육자는 여성이다. 우리나라 기혼 직장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여성이 63.6%, 남성이 1.8%로 집계됐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활용한 직장이 1만4698명 가운데 여성은 1만3059명(88.8%), 남성은 1639명(11.2%)으로 파악됐다. 경력단절 기혼 여성의 42.5%가 경력단절 사유로 육아를 꼽았다. 6세 이하 자녀가 있는 여성의 37.7%, 7~12세 자녀가 있는 여성의 21.1%가 경력단절을 경험했다.
나도 아픈데 뒷바라지… 도망가고 싶었다
여순(55세, 자영업자)씨의 재택치료는 오히려 혹독했다. 가족이 모두 확진돼, 여순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가사노동과 병간호를 도맡았다. 가족들의 증상이 심해질까 봐 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여순씨는 요식업계에서 18년을 종사했으며, 10년 전 자신의 식당을 열어 경영 중이다. 현재 동거 가족은 간호사인 큰딸, 취업 준비생인 작은딸, 직장인 남편이다. 두 딸과 남편은 이달 2일 확진돼 각자의 방에서 격리했다. 이후 여순씨가 3일 확진돼 거실에서 지냈다.
“저도 증상이 있었는데, 딸들과 남편은 저보다 더 기침이 심하고 열도 계속 떨어지지 않았어요. 다들 콜록거리니까 모여있는 것보다는 각자 방에 들어가 떨어져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제가 거실에서 지내면서 몽롱한 상태로 계속 죽 끓이고, 반찬을 하고, 빨래를 갈아주면서 간병을 했어요. 처음에는 가족들 걱정에 아무 생각이 안 들었는데,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니까 다 놔두고 달아나고 싶었어요”
“제 식당은 아침, 점심 장사를 해요. 오전 8시부터 손님을 받고, 오후 3시에 주문을 마감해요. 퇴근 후 시장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주문하고, 집에 와서도 밥을 하죠. 작은딸이 집에서 공부 중이라 빨래와 청소를 많이 도와줘요. 그 애 덕분에 제가 숨을 돌릴 시간이 있어서 고맙죠. 재택치료 기간에 작은딸도 아프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이 저 혼자 모두를 돌보려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서 눈물이 찔끔 나왔어요. 내가 평생 가족들을 뒷바라지할 운명을 타고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식당은 딱 9일 쉬고 다시 열었어요. 아직 몸에 기운이 없기는 하지만, 단골 손님들이 실망할까 봐 식당을 오래 휴업할 수 없어요. 남편은 지금도 기침과 가래가 심해서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이런 사태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만약 또 다른 감염병이 온다면, 왠지 저는 그때도 가족들을 돌보고 있을 것 같아요”
가족의 질병에 따른 부담이 여성에게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2019년 삼성서울병원·국립암센터 등이 공동 연구한 결과, 남편 암 환자의 86.1%는 아내에게 간병을 받았다. 아내 암 환자는 36.1%만 남편의 간병을 받았다. 대림성모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이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와 공동조사한 결과, 여성 유방암 환자의 10명 중 3명(33.4%)은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꼈다고 답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