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가진 게 없다. 자본도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도 없다. 오직 창의력과 기술, 지금 우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구자학 아워홈 회장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80년 (주)럭키 대표이사 재직시절 기업과 나라가 잘되려면 기술력만이 답이라고 여긴 구 회장은 기술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의 노력은 국내 최초 잇몸치약, 국내 최초 플라스틱 PBT, 세계 최초 램버스 D램 개발 등 커다란 열매로 맺혔다.
"나라가 죽고 사는 기로에 있다. 기업은 돈을 벌어 나라를, 국민을 부강하게 해야 한다."
1930년 7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구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일념 하나로 산업 불모지를 개척했다. 1960년 한일은행을 시작으로 호텔신라, 제일제당, 중앙개발, 럭키(현 LG화학), 금성사(현 LG전자), 금성일렉트론(현 SK하이닉스), LG건설(현 GS건설) 등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일선에서 뛰었다.
구 회장은 1957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딸 이숙희 씨와 결혼하면서 삼성그룹의 제일제당과 호텔신라 사장 등을 지내며 10여 년간 일을 했다. 그러다 LG로 옮기게 되는데 이는 1969년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면서 형성된 LG와 경쟁구도 때문으로 전해진다.
구 회장은 2000년 LG유통 식품서비스 부문을 독립시켜 아워홈을 설립했다. 지난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20여 년간 설립 당시 매출 2125억원에 불과한 아워홈을 2021년 매출 1조7408억원으로 719.2%(8배) 성장시켰다.
구 회장은 음식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미국 유학 시절 직접 김치를 담가주고 용돈벌이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LG건설 회장 재직 당시 LG유통 FS사업부에서 제공하는 단체급식에 불만이 있었던 구 회장은 아워홈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직접 현장을 찾아 임직원들과 머리를 맞대며 맛과 서비스, 제조, 물류 등 모든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기술개발을 경영의 '제1의 가치'로 여긴 구 회장은 첨단산업 분야 못지않은 연구개발(R&D) 인프라에 역량을 쏟았다. 그래서 단체급식업체로는 최초로 만든 것이 식품연구원이다. 식품연구원을 만들 당시 임원들은 "단체급식 회사가 대량 생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연구원까지는 불필요하다"며 볼멘소리를 냈다고 한다.
구 회장의 기술개발 가치로 아워홈은 지금까지 1만5000여 건에 달하는 레시피를 개발했다. 아워홈에 따르면 현재 연구원 100여 명이 매년 약 300가지의 신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업계 최초 노로바이러스 조사기관, 축산물위생검사기관, 농산물안전성검사기관 등 공인시험기관으로서 역할도 수행하며 국내 안전 먹거리 생태계 조성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구 회장은 70세 나이가 무색하게 생산·물류센터 부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생산·물류 인프라 구축에도 역량을 쏟았다. 그래서 아워홈은 현재 업계 최다 생산시설(9개)과 물류센터(14개)를 운영하며 전국 1시간 내 신선한 식품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구 회장은 와병에 들기 전 경영 회의에서 은퇴 후 소박한 바램을 이렇게 털어놨다.
"은퇴하면 경기도 양평에 작은 식당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커져 버렸어요. 그동안 같이 고생한 우리 직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12일 오전 구 회장은 향년 93세 나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퇴장은 가슴 속 정열을 안고 치열하게 살아온 1세대 산업역군의 퇴장을 의미한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숙희 씨와 아들 본성(아워홈 전 부회장), 딸 미현·명진·지은(아워홈 부회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이며, 발인은 15일 오전 8시다.
윤은식 기자 eunsik8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