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박해일의 ‘헤어질 결심’ [쿠키인터뷰]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박해일의 ‘헤어질 결심’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2-06-28 19:09:02
배우 박해일. CJ ENM

“예를 들어 박해일이라고 생각해보자”는 말에서 시작됐다. 박찬욱 감독은 배우 박해일을 생각하며 영화 ‘헤어질 결심’ 해준 역할을 썼다고 지난 2일 제작보고회에서 말했다. 박 감독이 고등학생 때 읽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주인공처럼 속이 깊고 신사적인 형사를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으로 쓰고 싶었다. 함께 각본 작업을 한 정서경 작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형사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예로 든 배우가 박해일이었다. 인물 이름인 장해준의 ‘해’자도 박해일에서 따왔다.

배우 캐스팅을 먼저 하고 각본 작업을 시작했기에 대사도 달랐다. 영화 ‘덕혜옹주’(감독 허진호)에서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한 박해일의 모습을 본 박찬욱 감독이 해준에게 시적인 문어체 대사를 주기도 했다. 그런 어려운 대사들이 박해일에겐 오히려 매력적이고 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게 했다. 지난 23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일은 “캐스팅을 먼저 한 상황이면 창작자는 시나리오를 쓸 때 배우가 가진 기질을 더 활용할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생각보다 잘 읽혔어요. 이해 못 하는 내용이 많을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거든요. 물론 읽으면서 질문도 많이 생겼지만, 자연스럽게 읽히는 내용이 꽤 많았어요. 캐릭터는 난해하고 어려운 것보다 그 인물이 정말 되어보고 싶을 정도로 대사 느낌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촬영장에서 연기할 때도 제 연기에 대해 감독님이 디테일한 것까지 지시해주시고, 저 또한 감독님이 원하는 걸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탕웨이와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감정의 결을 보여주는 호흡으로 가야 했고요. 서로 만족스러웠던 촬영이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박해일은 “쉬운 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그동안 연기 인생에서 처음 맡은 형사 캐릭터다. 그것도 박찬욱 감독이 스웨덴 추리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기존 영화에 없던 형사에 가깝다. 형사 같은 면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과 극 중 인물이 겪는 감정의 파도와 결을 끌어안고 해내야 하는 상황들이 가장 큰 숙제였다.

“사건이나 드라마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장해준의 감정 상태를 기준으로 봐야 했어요. 해준은 형사고 형사인 것에 자부심이 있는 친구예요. 시경 최연소로 경감까지 달았고, 품위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단단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예의도 바르고 자기만의 일관된 루틴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려는 자존심도 있고요. 초반엔 그런 면을 보여주는 해준으로 끌고 가다가 송서래(탕웨이)를 만나면서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하죠. 나중엔 해준이 형사로 쌓아온 게 흔들릴 정도로 감정이 위태위태하게 나아가요. 감독님은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것 보다 에둘러서 감독님 방식대로 보여주길 바라는데, 손에 잡히지 않아서 괴로웠어요.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제가 배우로서 해야 하는 숙제니까요.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장면을 획득해서 좋았지만,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탕웨이 씨도 저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진 않았을 거예요.”

개봉 전 열린 ‘헤어질 결심’ VIP 시사회엔 그동안 박찬욱 감독과 함께 영화를 작업한 이들이 많았다. 박찬욱 감독이 기존에 만든 영화와 결이 다르다는 게 그날의 화제였다. 그럼에도 박 감독의 색은 잃지 않았다고 했다. 박해일은 “기존 박찬욱 감독님은 관객들 곁으로 다가와서 감정의 생채기를 내는 방식이었다면, ‘헤어질 결심’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관객이 먼저 다가가는 느낌으로 만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배우 박해일. CJ ENM

“박찬욱 감독님과 작업하며 신기한 점이 몇 개 있었어요. 감독님이 순간순간 포착하는 배우의 눈빛과 얼굴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열쇠가 되고 사건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핵심 장치가 되더라고요.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어떤 날은 감독님이 출근하면서 ‘오늘 잘생긴 해준 얼굴 찾기를 또 해볼까’라고 하셨어요. 잘생긴 얼굴 찾기가 쉽지 않은 마스크라 민망하더라고요. 감독님에겐 스타일도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과 제작진을 통해 배우들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나오기도 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지난달 제75회 칸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고 한국에 돌아온 박찬욱 감독은 “사실 제가 원했던 상은 남녀연기상”이라고 했다. 배우상을 받으면 다음 작품 캐스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박해일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박찬욱 감독이 전작으로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만큼, 이번에도 수상해서 자신이 일조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박 감독과 함께 송강호까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보고 “국내 영화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한국영화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도 느꼈다.

“칸영화제에 가니 다들 한국영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한국영화를 찾아보는 일이 일상이라고 느껴졌을 정도죠. 처음 가는 영화제가 수월하게 익숙해질 정도로 한국 영화 작품을 반겨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같이 했던 황동혁 감독님이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 시청자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게 너무 반가울 따름이에요. 과거엔 소수 작품과 영화인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렵게 세상에 알려지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신인배우가 갑자기 단숨에 할리우드에서 연기할 수 있는 사례들이 생기고 있죠. 많은 영화인 선배들이 어렵게 땀 흘려서 쌓아온 걸 후배인 제가 누리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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