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이 고통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에요. 이 고통이 신의 시험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은 전생에 내가 저지른 잘못이 있어 벌을 받는 것이라 납득할 수 있다면요.”
누군가의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광범위한 조리돌림을 당하고, 거기다 실직을 하고, 심지어 성폭력 사건의 피해를 당한 데다 몸담고 있던 조직의 2차 가해까지 한꺼번에 몰아친 때였다. 인생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뒤집혔다. 죽을까 말까 고민하던 날들이 지나고 그나마 살아보려는 의지가 생겼을 때, 네발로 기어가는 심정으로 심리상담사를 찾아갔다.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있을까요?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 벌을 받고, 고통을 겪은 사람은 끝내 보상을 받을까요? 세상이 이렇게나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니 나의 온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에요.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도 없는 도돌이표 같은 질문들에, 상담사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당신이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간이 흐르고 고통이 희미해진다 해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결정적인 질문은 미결인 채로 남아있게 된다고 말이다.
인생이 이렇게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질 수 있을까
재난은 도처에 있다. 개인적 재난뿐 아니라 사회적 참사도 너무 잦다. 예고 없이 찾아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하며,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여태껏 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일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고 세상은 그래도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그토록 비합리적인 믿음이 내 삶을 지탱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재난은 이해가 불가능한 사건이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난 것인지 합리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으니, 재난 피해자들에게는 영적 존재에 대한 탐구와 질문이 일반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어찌하여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질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잘못을 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앞으로는 그 잘못을 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난은 이해 불가능한 동시에 통제도 불가능한 사건이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이유를 알 수도 없는 사건이라면,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자아를 압도하고 인식을 마비시킨다. 내가 무엇을 하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미래를 살아갈 힘을 꺾는다.
그러니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신이 존재하기를, 카르마(Karma, 업보)라는 것이 존재해서 이 고통의 합리적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기를, 세상의 언어로 파악되지 않는 이 사건이 영적인 차원에서라도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존중과 겸손, 그리고 끈기
재난이 일어났을 때, 대중이 오히려 재난의 피해자들을 탓하는 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놀러 간 것이 잘못”이라는 등의 잔인한 여론이 있었다. 불행을 겪은 사람을 비난하는 심리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반응들 속에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재난이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곧 그런 일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당할 만한 사람만 당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다면, 그런 탓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나’는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와 자신을 분리하고 싶어 하는 심리는 재난을 목도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겠다(물론,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150여 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스러졌고, 온 국민은 이토록 황당한 참사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특수본이 꾸려져 수사도 진행 중이다. 경찰의 잘못과 시스템의 공백, 정부의 책임까지 다방면으로 원인을 찾아 이 같은 참사가 재발할 가능성을 줄여야 할 것이다.
허나 모든 합리적인 후속 조치가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끝내 정답 없이 남게 되는 실존적인 질문들이 있을 것이다. 재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이지만, 고통의 의미를 찾는 과정은 결국 개인에게 남겨진다. 그러니 재난 대응에서 심리 지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타인의 의지로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없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적 역량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얼마든지 비합리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종류의 겸손. 지치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끈기 같은 것들이 그런 존중의 바탕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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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진
청년정의당 전 대표. 청소년 시절부터 정치권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중학생 시절 두발복장규제와 체벌 등 학생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맞서 학교를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진학한 후에도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 등 청소년 인권 관련 활동을 했다. 2019년 정의당의 청년 대변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