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생소한 ‘의사과학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정부와 학계는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투자를 시작했지만, 충분한 인재를 배출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출신으로, 의학적 전문성에 기반해 과학기술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신약 개발과 의료기술 향상에 필수적인 인력으로,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의료기관과 연구실을 누빈다. 의사과학자를 정의하는 명확한 자격기준은 없다. 의학학위(MD)만 받고도 정규적으로 과학기술 연구를 하면 의사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의학학위에 더해 별도의 과학기술분야 박사학위(PhD)를 받은 경우가 많다.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 전반에 걸쳐 제약사는 병원의 의료진과 긴밀한 소통을 해야 한다. 신약 후보물질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이들의 예후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는 의사들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들이 임상 현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제약사의 연구개발에도 시간과 집중력을 투입하기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이런 연결점의 부재가 신약 개발을 늦추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때문에 국내외 학계와 정부는 의사과학자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연구중심병원의 연구전담의사가 의사과학자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연구중심병원은 인력과 설비의 상당 부분을 신약, 신의료기술 개발에 할애하는 의료기관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고려대학교 구로·안암병원 등을 비롯해 총 10곳의 대학병원이 지정됐다. 이 병원에서 연구전담의사는 주당 8시간의 진료가 허용되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에만 전념한다. 다만 연구중심병원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한시적인 지원사업이기 때문에 연구전담의사가 지속적으로 의사과학자로서 역량을 쌓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내 의사과학자 양성 체계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정부 주도의 지원 사업인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과 ‘혁신형 의사과학자 공동연구사업’ 등이 2019년부터 시작됐다. 아울러 올해부터는 의사과학자의 연구기반을 안정적으로 지원한다는 목표로 ‘신진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에 착수했다. 지난 1960년부터 정부와 대학 주도로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한 미국과 비교하면 크게 뒤쳐진 셈이다.
대학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고대 구로병원 △한양대학교병원 △고신대 복음병원 △순천향대 천안병원 △인하대병원 △충남대병원 △영남대병원 △화순전남대학교병원 등이 2019년부터 혁신형 의사과학자 공동연구사업에 참여해 왔으며, 오는 12월 사업 종료를 앞두고 있다. 앞서 2월에는 △카이스트 △지스트 △디지스트 △유니스트 △포스텍 등 5대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가 의사과학자 양성협의회를 출범하기도 했다.
의사과학자의 역할에 관심을 두는 인재가 많지만, 이들이 선뜻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이민구 연세대학교 의사과학자 양성사업단장은 “점점 더 많은 수의 전공의가 의사과학자로서의 진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융합형 의사과학자 전공의 사업을 통해 그 여건도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단장은 의사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카이스트 및 의대기초학교실 교수와 같은 기초과학계 및 기초의학계 교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며 “제약회사, 바이오벤처기업 등의 연구책임자 및 바이오투자회사 심사관이나 국립보건원 등 산업계 및 정부기관으로 진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개연구를 수행하는 의대 임상학분야 교수가 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양질의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국내 환경 조성이 선결 과제로 꼽혔다. 이 단장은 “연구자로 성공하려면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연구업무의 경우 임상진료 업무에 비해 보상을 받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MD-PhD 학위를 받은 신진 의사과학자가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중요하다”며 “연구업무에 대해서도 임상 진료와 유사한 수준의 경제적·사회적 보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