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소담은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을 찍던 2021년 크게 앓았다. 피로가 쌓이고 목이 아팠다. ‘내가 왜 이러지? 번 아웃인가?’ 31세 젊은 배우는 혼란스럽고 우울했다. 알고 보니 큰 병이었다. 갑상샘 유두암. 진단이 조금만 늦었다면 목소리를 잃을 뻔했다고 한다. 박소담은 수술대에 누웠다. 6개월간 목소리 내는 훈련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관객 곁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씩씩했다. 16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오래 활동하려면 비워내는 방법을 알아야겠더라”고 말하며 웃었다.
18일 개봉하는 ‘유령’은 박소담이 수술 전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다. 그는 촬영 당시를 “인생에서 육체와 정신이 모두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떠올렸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해서다. 잠을 자려 누우면 ‘오늘은 왜 이 정도밖에 못 했을까’ ‘내일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검은 사제들’(감독 장재현) 등에서 줄곧 극찬받았던 그는 “두려움 속에서 잠든 건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촬영장에서 ‘제가 연기를 잘 못한 것 같다’며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그를 동료들이 붙잡아줬다. 배우 이하늬는 박소담의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춤까지 추면서 기운을 북돋웠다. 이해영 감독은 주눅 든 박소담에게 ‘난 쉽게 오케이 사인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의 연기력을 에둘러 칭찬했다. 박소담은 “영화를 보면서 내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하나하나 기억났다. 2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며 “하늬 언니 덕분에 내게 남은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1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하늬 등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하늬와 이 감독도 함께 울었다.
박소담이 맡은 유리코는 건강한 배우도 연기하기 힘든 캐릭터다. 성격이 급격히 바뀌는 데다가, 장총을 들고 구르는 등 고난도 액션을 소화해야 한다. 박소담은 6개월간 액션 스쿨에 다니며 “총과 내 몸이 하나”라고 느껴질 만큼 투지를 불살랐다. 4㎏ 장총을 자유자재로 다루도록 손목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구를 수 있게 발목 운동도 했다. 그는 “주요 액션을 원 테이크로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다. 덕분에 즉석에서 바뀌는 액션도 소화할 수 있었다”면서 “액션 장면에서 느끼는 쾌감이 크다. 설경구 선배처럼 오랫동안 액션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인생의 한 고개를 넘었기 때문일까. 박소담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은근한 ‘인싸’다. ‘유령’ VIP 시사회에 가장 많은 손님을 초대했다. 같은 연극에 출연했던 신구·이순재 등 원로배우부터 “혼자 유럽여행을 하다가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까지 나이와 생김새가 제각각인 친구들을 모두 부른 덕이다. 수술 후 건강은 대체로 좋아졌다고 한다. 말을 많이 하거나 높은 목소리를 내긴 어렵지만, 최근 예능 프로그램도 녹화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배우들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요. 저는 사람에게서 얻는 에너지가 큰 편이거든요. 그동안 좋은 것을 쌓고 나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던 것 같아요. 제가 받은 힘과 감사함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죠. 쉬는 동안 비우는 방법을 배웠어요. ‘유령’을 촬영하며 느낀 행복이나 유럽을 여행에서 얻은 기쁨 등을 응축해서 작은 주머니에 담아두고, 비워진 자리에 새로운 걸 담고 싶어요. 때론 온전히 혼자가 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뭘 원하는지를 스스로 묻기도 하면서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