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요즘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며칠 전에 접시 안테나를 달아 TV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스르륵 잠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동안은 TV가 나오지 않아 이런 편안함을 누리지 못했다. 주로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잤는데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TV를 보는 것만 못했다.
최근에 TV 드라마를 보면서 통쾌하다고 느꼈던 장면이 있다. 재벌가 젊은 여성이 회사에 처음 출근하면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 자기가 입고 다니던 생기발랄한 옷을 입고 나섰다.
이를 본 왕회장인 할아버지가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지적하자,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되지 머슴들처럼 입고 다닐 필요가 있나!”라는 취지로 대답했다. 왕회장은 당돌한 손녀의 대답에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 갈 현대판 ‘용의 자식’이 구태의연하게 일반 직원들처럼 답답한 복장을 할 필요가 있겠냐는 취지 아니겠나.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왕회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통쾌했다. 내가 만약 지금 다시 회사 생활을 한다면 나도 그 재벌가 여성처럼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입고 다니겠다. 머슴들처럼 답답하게 교복(?) 같은 옷을 입지 않고. 왜냐하면, 나는 ‘용의 자식’도 아니지만 ‘머슴’도 아니니까. 그럼 나는 뭐? 회사의 직원.
80년대 후반 내가 처음 출근할 때만 해도 정부청사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자가용을 가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공무원이 자가용을 가지고 출근하면 마치 뇌물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여겼으니까. 특히 나처럼 행정고시 출신도 아닌 7급 공무원 출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차가 있었고 나는 뇌물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냥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정부청사 주차장에 자가용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는 렌즈 색깔이 변하는 안경을 쓰고 다녔다. 햇빛을 밭으면 렌즈 색깔이 선글라스처럼 진해지고 실내에 들어오면 색깔이 옅어지는 안경이었다. 그 안경을 쓰면 선글라스를 별도로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편리해서 오랫동안 쓰고 다녔다. 그 당시 정부 과천청사에 그런 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선글라스 쓰고 다니는 애”로 불리기는 했지만 나에게 대놓고 그런 안경 쓰고 다닌다고 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표시 광고 심사 업무를 오랫동안 했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허위로 표시하거나 광고한 행위는 문제가 됐지만 소비자에게 반드시 고지해야 할 중요한 정보를 누락한 경우는 처벌할 조항이 마땅치 않았다. 둘 다 소비자를 속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한쪽만 처벌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건에 중요한 정보를 누락한 것도 부당한 광고라는 판단을 하나 슬쩍 끼워 넣었다. 결재과정이나 위원회의 최종 의결이 있을 때까지 누구도 그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위원회 의결이 있었던 날 나는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때는 혼자 그러면서 놀았다.
지레 겁먹고 알아서 기는 것이 머슴이 되는 길이다. 그런데 알아서 기지 않고 막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의외로 뭐라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제 앞가림하느라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간혹 후미진 곳에서 심심풀이로 남 얘기들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며 살 필요가 있을까.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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