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강철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야구대표팀은 지난 8일부터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리그 B조 1라운드에서 2승 2패를 기록해 조 3위에 그쳐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호주와 본선 첫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7대 8로 패배하고 일본에게는 4대 13으로 콜드패를 간신히 면했다. 2연패를 안고 나선 체코전에서 7대 3으로 승리해 대회 첫 승을 거뒀고, 중국전은 22대 2로 대승을 거뒀지만 이미 탈락이 확정된 후 열린 경기라 의미가 퇴색됐다.
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 등 전성기를 맞았던 한국은 2013년 대회부터 3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맛봤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이 감독은 4강 진출을 목표로 삼았지만,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일찌감치 귀국했다.
대회 준비부터 불안했던 이강철호
이번 WBC 대표팀은 준비 과정부터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보통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팀들은 개최지 혹은 개최지 인근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하고 실전 대회에 돌입한다. 같은 조 일본 대표팀은 일찌감치 일본 미야자키에 캠프를 차리고 컨디션 조절에 집중했다. 호주 대표팀도 한국보다 약 열흘 먼저 일본으로 이동해 현지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이동 및 시차 적응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일본과 호주는 1라운드에서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했다.
반면 한국 대표팀은 지난 2월 중순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 스포츠콤플렉스에 전지훈련 캠프를 차렸다. 해당 장소는 이 감독의 소속팀 kt가 전지훈련지로 사용한 곳이다. 대표팀과 kt를 동시에 이끄는 이 감독은 어느 한쪽을 놓을 수 없어서 대표팀 훈련을 투손에서 진행했다.
이로 인해 대표팀 소집 선수들은 미국으로 모이게 됐다. 소속팀이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하던 선수들도 있었지만, 일본이나 호주 등에서 전지훈련을 보내던 삼성, 롯데, 두산 등의 선수들은 다시 미국 애리조나로 넘어와 훈련을 하게 됐다. 눈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상 기후에 선수들은 제대로 훈련도 하지 못했다.
약 2주 간의 짧은 전지 훈련을 마친 대표팀은 3월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WBC 1라운드가 우리와 시차가 없는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가 보름 남짓 만에 다시 돌아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설상가상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선수단 본진이 타기로 한 비행기가 고장이 나 35시간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시차 적응, 날씨 문제로 선수들의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못했다. 주전 3루수 최정(SSG 랜더스)은 근육통에 시달렸고, 투수들은 단체로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다. 대회 직전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와 연습 경기에서는 고우석이 목에 담 증세를 느껴 WBC에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경기당 6.8점 내준 마운드…에이스 투수가 없었다
이제껏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는 투수진에 확실한 중심축이 있었다. 2006 WBC에서는 박찬호,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09 WBC에서는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이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세웠다.
반면 이번 대회에서는 대표팀의 주축이 될 에이스 투수가 없었다. WBC 무대를 숱하게 밟은 김광현, 양현종 등 30대 중반의 베테랑들이 이번에도 태극마크를 달았다. 학교폭력 논란을 빚은 리그의 에이스, 안우진(키움 히어로즈)의 선발을 고민 끝에 포기하면서 마운드 뎁스는 더욱 얇아졌다.
이와 관련해 SSG 랜더스에서 뛰고 있는 추신수는 미국 텍사스 지역 한인 라디오 DKNET와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김광현, 양현종이냐. 이 선수들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어린 선수 중에 재능 있는 선수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WBC 같은 국제 대회에 나가면 어린 선수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마인드 자체가 달라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광현과 양현종은 이번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김광현은 2차전 일본전에 등판해 2이닝 3피안타 2볼넷 5탈삼진 4실점으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2회까지 일본 타자 6명 중 5명을 삼진 처리했지만, 3회부터 급격히 무너졌다. 양현종은 2라운드 진출 분수령인 호주전에서 구원 등판해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지 못하고 스리런을 맞고 교체됐다. 이후 남은 경기에서 아예 출전하지 않았다.
젊은 선수들도 이번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원태인, 김윤식, 소형준, 이의리, 곽빈, 정철원, 정우영 등 대표팀에 함께한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일본전에서는 스트라이크를 꽂지 못하고 계속 타자 몸쪽으로 공을 던지자 일본 선수들이 화를 내기도 했다. 일본 경기에서 나온 피안타는 13개, 사사구도 9개에 달했다.
이 감독의 부족한 투수 운영도 선수들 부진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투구 수 제한과 세 타자 상대 규정을 고민하던 이 감독은 대회 내내 교체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특정 투수들에게 의존하는 마운드 편중 현상이 심각했다. 확실한 선발 카드도 정해놓지 않아 전 경기에서 불펜으로 나선 선수들이 다음 경기에서 선발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감독은 일본전 패배 후 “투수진 운용 실패는 내 책임”이라고 인정했고, 13일 중국전을 마친 후에도 “확실한 선발을 정했어야 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 못 정해서 성적이 안 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자책했다.
부흥기 이끈 베테랑들의 퇴장, 필수가 된 세대 교체
이번 대표팀 컨셉은 신구 조화였다. 1986년생의 박병호부터 2002년생의 이의리까지, 경험 많은 베테랑과 젊은 선수들이 고루 어우러진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오히려 세대교체에 대한 고민만 떠안게 됐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한국 야구의 부흥기를 이끈 베테랑들은 대거 유니폼을 벗을 것으로 예상된다.
WBC 대표팀 주장을 맡은 김현수(35)는 중국전이 끝나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믹스트존에서 “저는 이제 끝났지만 ‘팀 코리아’를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보다 나이가 많은 박병호(37), 최정(36), 양의지(36) 등도 3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어 대표팀 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장 3루수와 포수 자리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여럿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모두 30대에 접어들었다. 3루수 자리에 롯데 자이언츠의 한동희(24), 한화 이글스의 노시환(23)도 있지만 아직까지 성장을 필요로 한다. 포수는 더욱 심각하다. KBO 10개 팀의 주전 포수들이 모두 30대다.
투수진에서도 김광현(35)이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김광현은 “(국가대표를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이제는 후배들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김광현과 동갑내기인 양현종(35)도 국가대표를 떠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세웅(28)과 원태인(22)이 이번에 그나마 가능성을 보였지만, 나머지 투수들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올해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AG)과 11월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은 세대교체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대회가 될 전망이다. 두 대회 모두 출전 나이 제한 규정이 있다. 이번 AG의 경우 만 25세 이하(1998년생 이후 출생) 또는 프로 입단 4년 차 이하 선수들로 대표팀을 구성하고, APBC는 24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한다. 해당 대회에서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