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형제약사(빅 파마, Big Pharma)가 연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블록버스터급 신약을 확보하기 위한 바이오업체 인수전에 나섰다. 최근 금리 인상 등으로 자금 확보가 어려운 국내 바이오업계도 이를 눈여겨보며 합병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지난 13일 화이자는 미국 종양 전문 신약 개발기업 시젠을 430억 달러(한화 약 56조 원)에 인수했다고 밝혔다. 시젠은 앞서 미국 제약사 머크(MSD)와 52조 원 규모의 인수합병을 논의했지만, 가격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한 화이자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젠은 약 40조 원의 시장 가치를 지닌 기업이다. 파이프라인 항암제 3종과 항체약물접합체(ADC) 기술로 만들어진 투키사(성분명 투카티닙)까지 총 4종의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 의약품을 보유하고 있다. ADC는 항체(antibody)와 약(drug)을 접합(conjugate)한 의약품을 말한다.
특히 파이프라인 중 호지킨림프종 치료제 애드세트리스(성분명 브렌툭시맙베도틴)는 지난해 전체 매출 20억 달러(약 2조6000억 원) 가운데, 8억3900만 달러(약 1조951억 원)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매출 비중을 보이고 있다. 내년부터 적응증이 추가되는 애드세트리스는 블록버스터급 신약으로 꼽히는 의약품이다.
시젠은 ADC 약물 기술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ADC 기술은 면역에 관여하는 항체와 암을 죽일 수 있는 약물을 결합해 암을 정확히 조준하고 사멸시킬 수 있는 혁신적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종양에 적용해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갖고 있다.
화이자 측은 이번 인수를 통해 풍토병으로 굳어진 코로나19 즉, 엔데믹을 대비할 계획이다. 화이자는 지난해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판매로 1000억 달러(약 130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부터는 백신과 치료제 수요가 점차 줄어드는 만큼 또 다른 블록버스터 의약품이 필요한 상황이다. 화이자는 “해당 거래를 통해 100억 달러가 넘는 추가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사노피 역시 13일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미국 제약사 프로벤션 바이오를 29억 달러(약 3조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프로펜션 바이오는 1형 당뇨병 발병을 지연시키는 약물 티지엘드(성분명 테블리주맙)를 개발한 기업이다. 현재 티지엘드는 1형 당뇨병 2기에 해당하는 성인 및 8세 이상 소아 환자의 3기 발병을 지연시키는 유일한 치료제로, 지난해 11월 FDA 허가를 획득했다.
1형 당뇨는 면역세포가 췌장 베타세포를 공격해 파괴하면서 인슐린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질환으로 평생 인슐린을 투여해야 살아갈 수 있다. 티지엘드는 이 같은 1형 당뇨 환자의 발병 시기를 약 2년 정도 늦춰줄 수 있다는 임상 결과를 보여줬다.
사노피는 1형 당뇨가 매년 약 6만5천 명이 진단받는 질환인 만큼 회사의 성공 잠재력이 높을 것으로 평가했다.
이 외에도 지난달 모더나는 일본기업 오리시로 지노믹스를 8500만 달러(약 1108억 원)에 인수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올해 심장 및 신장질환 파이프라인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 신코 파마를 18억 달러(약 2조2400억 원)에 넘겨받았다.
글로벌 빅파마 M&A 투자, 국내 스타트업에겐 ‘기회’
국가신약개발재단 ‘2023년 1월 신약 개발 관련 주요 Deal’ 자료에 따르면, 1월 한 달간 글로벌 주요 바이오 M&A는 총 10건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9월 3건, 10월 6건, 12월과 11월 각각 2건이었던 것에 비하면 대폭 늘었다.
전문가들은 자금력을 가진 글로벌 대형제약사들의 M&A 공략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2025년부터 예고된 ‘특허 절벽’에 따른 영향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글로벌 보건산업 동향에서는 오는 2032년까지 블록버스터급 바이오의약품 특허권이 50개 이상 순차적으로 풀릴 것으로 예고됐다.
익명을 요구한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머크, 화이자, BMS 등 다수의 글로벌 제약사가 자사가 보유했던 블록버스터급 의약품 특허 만료에 놓여있다. 특허가 만료될 경우 당장 매출 손실이 크다. 하지만 신약 개발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에 최근 바이오기업과의 인수합병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확보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 바이오업계에게는 희소식이 될 수 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임상을 추진할 예산이 없던 중소기업들에게 동아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금리 인상 등으로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바이오기업들의 몸값도 떨어졌다. 자금이 부족한 바이오 기업들은 기술 수출이나 M&A가 차선책이다. 글로벌 기업들에게는 혁신 기술을 가진 바이오기업을 인수할 절호의 기회”라며 “아직 국내 바이오기업과의 인수합병 사례는 많지 않다. 보다 적극적으로 국내 기업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한 “보통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임상을 진행할 예산이 없어 혁신적인 후보물질을 개발하더라도 멈춰서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글로벌 빅 파마와의 공동 연구개발은 폭넓은 영업 인프라와 인허가 전문 영역이 세분화돼 있어 개발에 실패할 확률이 국내만큼 크지 않다. 신속한 상용화가 가능해 보다 많은 환자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